묘갈명

소목도

 

  제주목사(濟州牧使)광주이공(廣州李公-諱 乙富) 묘갈명

 

슬프다. 이조 오백년(李朝五百年)에 사화(士禍)가 간간히 일어났다. 사화(士禍)가 일어나기만 하면 혹독함이 짝이 없으므로 사대부(士大夫)가 기밀을 보고 조정(朝廷)에 있지 않고 먼 지방으로 숨어버린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제주목사(濟州牧使)이공(李公)도 그 한분이시다. 공(公)의 휘(諱)는 을부(乙富)요 자는 내윤(乃潤)이며 그 선대(先代)는 광주인(廣州人)이시다.

 

신라왕조(新羅王朝) 내사령(內史令) 휘(諱) 자성(自成)공의 후예로 문호(門戶)가 창성하여 우리나라 대성(大姓)이 되었다.

 

고려말(高麗末)에 휘(諱)양중(養中)은 형조참의(刑曹參議)로 국운(國運)의 다함을 보고 산에 은거(隱居)한 충절신(忠節臣)으로서 두문동(杜門洞)칠십이현(七十二賢)중 한분이시며 공의 고조(高祖)님이시다. 수생(遂生)은 금산군수(金山郡守)로 이 분은 증조(曾祖)님이요, 경철(景哲)은 성균진사(成均進士) 와 선공감역(繕工監役)으로 학행(學行)이 세상에 떨치니 이 분이 조부(祖父)님 되시고 아버지(父)의 휘(諱)는 음(蔭)이며 충순(忠順)교위(校尉)이셨다.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니 공을 세조(世祖)기묘년 경기(京畿)광주(廣州)흑석리에서 낳으시니 현 동작동(銅雀洞)이다.

 

공(公)의 자품(資稟)이 순수(純粹)하고 어려서부터 신채(神彩)가 광윤(光潤) 하니 장래 큰 위인(偉人)이 될 줄 알았다. 어려서 조부(祖父)님 감역(監役)공에게 수업하였는데 할아버지께서 성실(誠實)함을 사랑히 여겨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힌 다음에 또 다른 글을 읽게 하니 공이 또한 분발(奮發)하여 도맥을 찾아 연구(硏究)하니 착한 소문이 날로 떨친지라. 공(公)이 선대(先代)의 충정(忠貞)을 생각(生覺)하여 뒤이음만 생각하고 벼슬을 즐겨 아니하니 마침내 문중(門中) 어르신들의 권유(勸諭)로 나이 서른(三十歲)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헌부(司憲府)에 봉직(奉職)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 봉직(奉職)하던 중(中) 부친(父親) 상사(喪事)를 당하여 죽을 마시며 채식만 하고 삼상(三霜)을 마치니 사람들이 거상(居喪)을 잘하였다고 일컬었다. 다시 글을 읽다가 연산(燕山)5년 기미(己未)에 이르러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제수(除授)하고 정사(政事)를 잘 하니 백성들이 그 크신 공덕(功德)을 흠모하였다.

 

항상 늙은 모친(母親)과 떨어져 있으므로 불안(不安)을 느끼다가 마침내 어머니를 모셔와 효도(孝道)를 극진히 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고향(故鄕)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印)을 끌러놓고 지름길로 지금의 낙안(樂安)고을 오봉산 밑 내동(內洞)으로 둔거(遯去)하시었다. 동내서편(洞內西便)에다 정자(亭子)를 짓고 산수락(山水樂)을 붙였다. 이 고을 이름난 선비들이 좇아와 사귐을 청하고 청년(靑年)들이 글을 가르쳐 주길 청(請)함에 거절치 못하고 각각(各各) 그 재질에 따라 가르쳐 주었다.봄과 가을을 당함에 글과 술로 서로 모여 즐겨하여 늙은줄 모르니 이에 가히 공이 흉금이 청광하여 매미가 탁한 가운데 벗이 나며 정신(精神)이 속해(八垓)의 밖에 놈과 같았다. 어찌 영길 치 아니한 분일까. 공(公)께서는 중종(中宗)23년 무자(戊子) 구월(九月)에 졸하시니 향년(向年) 칠십(七十)이셨다. 내동(內洞) 후록 간좌(艮坐)에 장사(葬事)를 모셨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이시고 사직천주(司直天柱)가 그 아버지이다. 아들은 영례(英禮)이시며 검교 대호군(檢校大護軍)이셨고 손자(孫子)정손(貞孫)은 성균 진사(成均 進士)이시다. 그 이하는 기록치 아니하노라. 공(公)이 기국(器局)이 영매(英邁)하고 심성(心性)이 관후(寬厚)하며 학문(學文)이 심수하였고 벼슬함에 청렴(淸廉)하였으며 어버이에 효도(孝道)하고 기미를 보고 썩 물러서 그 할아버지의 풍덕(風德)을 저버리지 아니하니 한갖 입으로만 충의(忠義)만 말하고 화복을 무서워 한자로는 같이 말할 분이 아니다.  아! 광주성씨(廣州姓氏)가 이 지방에 거주(居住)함에 공(公)으로부터 비롯하여 수백년이 된지라. 뒷자손 이 오히려 고가(古家)의 풍범(風範)을 잃지 아니하니 그 선대 궁벽한 고을에 떨어져 살다가 들음이 없는 자 에 비교하면 그 다행함이 어떻다 할까? 우리 선조 생원(生員)공 휘 지남(地男)이 공의 자손(子孫) 단성현감 휘(諱) 봉(鳳)이 사위되어 또 사화(士禍)로 비로소 이 지방에 살아 두 집 자손(子孫)이 지금까지 설 좋아하였다. 이제 후손들이 글을 나한테 청(請)한 것은 선대(先代)로부터 좋아함이라. 어찌 글 못함으로서 사양할까.

명 왈(銘 曰)

대저의 범의(範義)를 지킨 나머지 공(公)이 나셨다.

벼슬을 가벼운 털 보듯 하였으나 사람의 권함으로 삼십(三十)에야 벼슬을 하였다.

제주(濟州)를 다스림에 모든 폐단(弊端)이 없어졌다. 낙안(樂安)으로 피난하여 일생(一生)을 넉넉히 지냈으며 자손(子孫)이 행세를 하니 그 뒤가 적막치 아니하도다.

 

계해추(癸亥秋-1983년)  광산(光山)이민수(李玟秀)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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