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판윤퇴암공(휘 천기) 묘갈명

 

公諱天奇字表爾號退菴官至漢城判尹姓李氏廣州人也系出羅朝中興麗朝世稱巨族而五代祖諱養中號石灘麗朝刑曹叅議太祖革命之初抗不臣之節遯去杜門洞七十二賢龜巖書院配享妣貞夫人晉州姜氏高祖諱遇生左贊成妣貞敬夫人海州崔氏曾祖諱錫哲號月峯水原府使妣貞夫人潘南朴氏祖諱萌吏曹叅議妣貞夫人海州吳氏考諱師晟號南坡敦寧府副正妣淑夫人東萊鄭氏始榮之女也皇明丙辰三月五日生公于京社稷洞公天性嚴豪果斷事親以孝交友有信臨官淸潔世稱聖官當燕山朝燕山君淫虐無道戊午七月之變起當死者皆一流名士又庚申夏早無雨天雷于闕門甲子史獄亦起燕山君違國法强開史庫親見廢妣之事無辜大臣盡殺而獨公與三大臣配于靈光丙寅恭僖王靖國後累徵公謝病不就構亭于郡南鶴膝里涵養德業子孫代代簪纓榜章連續鶴村前峴世人稱曰榜峙此豈非天佑之陰德乎公子諱芳號白溪孝陵叅奉妣恭人光山金氏孫諱峻齡號竹軒漢城判官妣淑夫人錦山金氏次峻茉正德庚辰進士妣宜人昌原黃氏曾孫諱宏中號鶴梅三禮察訪妣宜人晉州姜氏次容中號菊圃庚午生員壬辰亂與兄倡義守城之功妣宜人慶州金氏玄孫十餘昌威多而不殫錄也丙子正月二十三日卒墓放光山亥坐之原配貞夫人密陽朴氏郡守芉女也墓雙墳噫乎惟忠惟孝以永其貽雲仍勿墜懼久先祖之實蹟湮滅宗員協心鳩財奉獻堅碑敬悚刻辭

      乙亥一九九五年三月    日

退菴十三代孫  大淳  謹識    

 

한성판윤 퇴암공 휘 천기 갈문(漢城判尹退菴公諱天奇碣文) 國譯

 

공의 이름은 천기요 자는 표이며 호는 퇴암 관은 한성판윤이요, 성은 이씨며 본은 광주라. 선은 신라 때부터 조정에 중용되었고 고려 때에 명문 거족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五대조 휘 양중 호 석탄 관은 고려조 형조참의요, 조선조 태조 형명당시 신하 되기를 거절하고 두문동에 은거(두문동 七十二현)하였으며 구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비는 정부인 진주강씨이고 고조의 휘는 우생 관은 좌찬성 비는 정경부인 해주최씨요, 증조 의 휘 석철 호 월봉 수원부사 비는 정부인 반남박씨요, 조의 휘 맹 이조참의 비는 정부인 해주오씨요, 고의 휘 사성 호 남파 동영부부정 비는 숙부인 동래정씨 시영의 딸이라. 황영 병진 三월 五일 공은 서울 사직동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성품이 엄호과단하시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벗을 사귐에 신의있고 관에 임하여 청백함으로 세상이 성관이라 하더라.

연산조에 이르러 연산군이 음학무도하여 무오년 七월의 변을 일으켜 일류명사들을 사형시키고 또한 경진년 여름 가물어 비도 안오는 날 궐문 밖에 벼락이 떨어지더니 갑자년 사옥을 일으켜 연산군이 국법을 어기고 사고를 강제로 열어 폐비지사를 친히 보고 무고 대신들을 다 주살하고 홀로 공과 더불어 三대신이 영광으로 유배되셨다. 병인(공희왕) 중종반정 후 여러 번 부르셔도 공은 병으로 사례하시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군남 학술리에 정자를 지으시고 덕업을 함양하시어서 자손이 대대로 교지방문이 자조부터 확실 앞 고개를 방고개라 하더라. 이 어찌 하늘이 도와주신 음덕이 아니던가.

공의 아들 휘는 방이요, 호는 백계 관은 효릉참봉이요, 비는 공인 광산김씨이며 손의 휘는 준영 호 죽헌 한성판관이며 비는 숙부인 금산김씨요 차에 준말 경진 진사요, 비는 의인 창원황씨요, 증손은 휘 굉중 호 학매 삼례찰방 비는 의인 진주강씨요, 차에 휘 용중 호국포 경오생원이며 임진란 때 그 형과 더불어 영·호남 수성하는데 큰 공을 세우셨다. 비는 의인 경주김씨며 현손은 십여 손으로 번창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병자 正월 二十三日 서거하시니 묘는 방광산 해좌에 모시고 배는 정부인 밀양박씨 군수 간의 녀이며 묘는 쌍분이다.

슬프도다. 오직 자손은 효도와 충성으로 길이길이 전하기를 빌며 오래되면 선조의 실적을 잊을까 두려워 해서 종원들의 정성을 모아 이 비석을 받들어 세우며 공경히 이 글을 새기노라.

    을해 一九九五년 三월

퇴암 十三대손 대순 근지

 

 

 

 

 

  한성판윤퇴암공(휘 천기) 실적

 

公諱天奇字表爾號退菴姓李氏廣州人也五代祖諱養中號石灘故  高麗朝通政大夫刑曹左叅議  李朝革命當時  太祖太宗累徵不起高祖諱遇生官至司醞署主簿贈吏曹判書曾祖諱錫哲號月峯官水原府使祖諱柯號圃叟官至吏曹叅議考諱師晟號南坡官至副正佐郞  妣淑夫人東萊鄭氏始榮之女也  黃明丙辰三月五日生公于京社稷洞公天性嚴豪果斷事親以孝交友有信臨官淸潔不事家業留意學文與人論說諱諄不知倦非疾病未嘗一日處於內其居官務持大體不事細察至決大議未嘗小搖其聽敏速撮要剖斷如神不許奸吏寬容良民世稱善官當燕山朝燕山君淫虐無道戊午七月之變起當死刑者皆一流名士是日雨下如注大風拔屋人無不顚之天雷不息庚申夏早無雨天雷于闕門甲子史獄亦起燕山君違國法强開史庫親見廢妣之事益大怒九月二十九日傳曰戊午史草事其黨多分配外方之李天奇曺壽金暄姜詞姜謙姜鶴孫李繼孟趙之瑞鄭誠謹沈順門金宏弼洪湜朱溪君深源李幼寧此輩用之何處幷令拿來文平公李繼孟輔德趙之瑞丞旨鄭誠謹直堤學沈順門大司諫姜詷正郞姜謙佐郞金宏弼承旨洪湜朱溪君深源李幼寧九人甲子十月皆被壞禍大行誅戮至有碎骨飄風之刑李天奇戶判曺壽銓郞金暄漢判姜鶴孫司評四人永刑削職勿拜赦典其行刑時公亦就拷公泰然自若少不動顔色不變言語如雷  曰無辜大臣盡殺誰與治國乎殺之輒於殺之不必煩問左右大臣極諫是以得免苑永削官職遷配于靈光同被謫曺壽金暄姜鶴孫四人同時下靈光同被謫友四人誼若兄弟相去相來丙寅  恭僖王靖國革命廢腐政尙儒道專意文治搜訪竄臣復官職徵公公謝病不就遂構亭于郡南鶴膝里以吟風詠月送餘生乙亥冬臺臣發議又徵公公亦不起有勸者曰方今  聖上尙文治道何可不歸乎公歎曰君聖臣賢昇平之治然而亂臣賊子何代無之安知他日之禍乎公卒二年後己卯之禍果起趙文正諸賢又罹網打人皆追慕公之明鑑焉丙子正月二十三日卒墓靈光郡南便放光山亥坐之原配貞夫人密陽朴氏郡守芊女也墓雙墳噫乎公子孫代代簪纓連綿榜章連績不絶鶴膝村前峴世人稱榜峙此豈非天祐之陰德乎公孫子峻齡懼久先祖之實蹟湮滅要余作詞畏敢略叙焉

      嘉靖己丑年二月    日

高峯  奇大升  撰    

 

퇴암공 휘 천기 실적(退菴公諱天奇實蹟) 國譯

 

공의 휘(諱)는 천기요, 자는 표이며 호는 퇴암이요, 성은 이씨며 본은 광주라. 오대조 휘(諱)는 양중이요, 호는 석탄이며 고려조 때 통정대부 형조 좌참의이요, 이조혁명 당시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이 벼슬을 주어도 받지 아니하시었다. 고조의 이름은 우생이요 벼슬은 사온서 주부에 증이조판서요, 증조 이름은 석철이요 호는 월봉이며 벼슬은 수원부사이시고, 조부 이름은 붕(柯)이요 호(號)는 보수(圃叟)이요 벼슬은 이조참의시고, 아버지의 이름은 사성이요 호는 남파이며 벼슬은 부정좌랑이시고 어머니는 숙부인 동래정씨 시영의 딸이시다. 황명 병진 삼월 오일에 서울 사직동에서 공을 나으시니 공은 천성이 엄혹 과단하시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며 관원이 되면 청백하여 축재(蓄財)를 하지 아니하고 학문에 열중하며 사람들과 토론할 때면 서서히 사리에 대한 경위를 주장하고 심한 병이 아니면 하루도 안방에 있지 아니하며 관직에 있을 때에는 특별히 대체를 주장하고 소소한 일은 간섭하지 아니하며 대의(大義)를 결정할 때면 침착하며 요점을 들어 신속히 판단하고 간사한 관속은 용서하지 아니하며 양민들은 관대하니 세상사람들이 선관이라 칭찬하더라. 연산조(燕山朝)에 이르러 영산군이 음란하고 포악하여 무오년 칠월에 정변이 일어나 많은 대신들이 사형을 당하니 모두 일류 명사였다. 이날 비가 내려 땅이 페이고 바람이 불어 지붕을 걷으니 걷는 사람이 넘어지고 뇌성벽력이 심했고 또 경신년 여름이 가물어 비도 안 오는 날 궐문 밖에 벼락이 떨어지더니 갑자년 옥사가 또 일어나 연산군이 국법을 어기고 장사고(藏史庫)를 열어 보고 폐비사실을 알자 연산군이 더욱 대노하여 구월 이십구일에 영을 내려 가로되 『무오년 사초에 가담한 자들이 많이 외방에 귀양갔으니 이천기 조수 김훤 강형 강겸 강학손 이계맹 조지서 정성근 심순문 김핑필 홍식 주계군 심원 이유영 등 이 무리는 무엇에 쓰리요, 모조리 잡아오라』하여 문평공 이계맹, 보 덕 조지서, 승지 정승근, 직제학 심순문, 대사간 강형, 정랑 강겸, 좌랑 김굉필, 승지 홍식, 주계군 심원, 이유영 아홉 사람은 갑자년 시월에 모두 사형을 시켜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고 호판 이천기, 전랑 조수, 한판 김현, 사평 강학손 네 사람은 다 관직을 삭탈하다.

그 때에 퇴암공도 형장에 나아가 고문을 당할 때 공은 태년부동하여 낯빛을 변하지 아니하고 큰 소리로 분명히 말하기를 『나 하나 죽는 것은 좋으나 죄없는 대신들을 다 죽이면 누구와 더불어 국사를 의논하리요,  헛되이 묻지 말고 어서 죽이라 하니, 좌우대신들이 극히 간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고 삭탈관직에서 영광으로 귀양을 보내니 같이 귀양명령을 받은 조수, 김훤, 강학손 세 사람이 동시에 영광으로 오다 같이 귀양 온 네 사람은 정의가 형제같아 서로 가고 서로 와서 왕래가 자주더니, 병인년에 중종이 반정하여 부패된 정사를 쇄신하고 유도를 숭상하여 문화정치를 베풀고 귀양간 대신들을 찾아 관직을 도로 주며 공을 부르되, 공은 병을 핑계삼아 절대 가지 아니하고 군 남쪽 학슬리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음풍영월도 여생을 보내더니, 을해년 겨울에 대신(臺臣)들의 동의로 또 공을 불렀으나 공은 이번 역시 가지 아니하니 복직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방금 성상이 문하정치를 베푸시고 모든 대신들을 불러 복직시키거늘 공은 어찌 안하느냐』하니, 공은 탄식하며 말하되, 『임금이 영명하시고 신하가 어지니 태평성대라 하지만 그러나 난신적자는 어느 때나 있는 것이니 어찌 뒷날에 변화가 없다고 단언하리요』하더니 공이 세상을 떠난지 이 년 후에 기묘년 변화가 또 있어 주문정 등 여러 대신이 일망타진의 화를 당하니 세상사람들이 모두 공의 명감함을 추모하더라. 병자년 정월 이십삼일에 별세하시니 묘는 영광군 남쪽 방광산 해좌에 있고 부인 정부인 밀양박씨는 군수천의 딸이요, 묘는 쌍분이다. 공의 자손이 대대로 벼슬하여 방장이 연속 부절하여 학슬리 앞산 고개를 세상사람들이 방장재라 하니, 이 어찌 하느님의 도우신 은덕이 아니리요. 영원히 번창하기를 비노라. 공의 손자 준령이 오래되면 선조의 실적을 잊을까 두려워 나에게 찬장을 청하기로 이 실적을 간추려서 기록하였노라.

    가정 기축(一五八九)년    月    日

고봉 기대승 지음    

 

 

 

 

 

  한성판윤퇴암공(휘 천기) 소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