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공 휘 소 묘갈명

 

공(公)의 휘(諱)는 소 요 자(字)는 회옹(晦翁)이니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고 조금커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여 약관(弱冠)도전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니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그 나이 어리고 재주가 준걸(俊傑)함을 사랑하여 뽑아 선전관(宣傳官)을 삼고 군령출납(軍令出納)을 반드시 공(公)에게 명(命)하니 응대(應對)하기를 소리와 같이함에 상(上)께서 모두 다 가(可)하게 여기더라. 공(公)의 초명(初名)은 명(蓂)인데 상(上)이 소(소)라고 고쳐주니 대개 소명(昭明)하다는 뜻을 취(取)하여 더욱 근면(勤勉)한 것이다. 이에 중시(重試)에 또 장원(壯元)하고 성화(成化)정해 이시애 난(丁亥 李施愛 亂)에 공(公)이 대장 어유소(大將 魚有沼)를 따라 정벌(征伐)하고 그 공(功)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오르고 그 해 또 서(西)쪽 건주위(建州衛)를 쳤다. 선능(宣陵)이 즉위(卽位)하여 원종공신 호(原從功臣 號)를 사(賜)하였다. 홍치 신해(弘治 辛亥)에 비장(椑將)으로 동여진(東女眞)을 쳐서 또한 공(功)이 있었다. 사조역사(四朝歷事)하여 출입(出入)하며 선력(宣力)함이 사십여년(四十餘年)인데 안으로는 첨지중추 훈련도정 각 위장(僉知中樞訓練都正 各 衛將)과 밖으로는 우후(虞侯),절도사(節度使),목사(牧使),부사(府使)를 모두 역임(歷任)하였으니 또한 공로(功勞)가 많았다.

 

공(公)이 뜻이 크고 장부(丈夫)의 기개(氣槪)가 있고 또한 서사(書史)에 익숙하여 자못 고금(古今)의 현부득실(賢否得失)을 아니, 진실로 범상한 무인(武人)이 아니었다. 벼슬이 여기서 그치니 어찌 명(命)이 아니겠는가? 홍치기미 오월십일일(弘治己未 五月十一日) 집에서 돌아가니 나이 오십구(五十九)세(歲)이었다.

이해 팔월 갑진(八月 甲辰)에 광주 무갑산 원(廣州 武甲山 原)에 장사(葬事)하니 공(公)은 광주인(廣州人)이라 죽어서 고향(故鄕)에 돌아감은 또한 사람이 원(願)하는 바이다. 공(公)의 고(考)는 수철(守哲)이니 평안도 절도부사(平安道 節度副使)요, 비(妣)는 증 병조판서(贈 兵曹判書)이맹상(李孟常)의 여(女)요, 조(祖)는 우생(遇生)이니 증 이조참의(贈吏曹參議)요, 증조(曾祖)는 양중(養中)이니 고려조(高麗朝)형조참의(刑曹參議)시다. 공(公)이 여흥 백민제(驪興伯閔齊)의 손자(孫子) 삼(森)의 여(女)를 맞아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니 남(男)은 창언(昌彦)인데 성균 생원(成均 生員)이요, 김순신(金舜臣)의 여(女)에게 장가들어 일남(一男)이 있으며 여(女)는 관찰사 정경조(觀察使 鄭敬祖)의 자(子) 승희(承禧)에게 출가(出家)하여 이녀(二女)가 있다.

 

명(銘)하니 왈(曰)

청년(靑年)에 말을 달려 성주(聖主) 알아주었고

일생(一生)동안 보국(報國)하고 사사로움 잊었다네.

옛날 광이(廣李) 봉작(封爵) 못 받들음은 정(正)히 수(數)의 탓인데

어찌 그 짝인가 위(位)가 여기에 그쳤네.

홍치(弘治)12年기미(己未-1499년))8月12日입석(立石).

大提學  洪貴達  지음(撰).

 

 

 

 

 

  유명조선국 절충장군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공 휘 소 묘비

 

공(公)의 휘는 소(昭)요 자는 회옹(晦翁)이니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고 차차 커가면서 활 쏘고 말 타는데 능숙해서 무과(武科)에 합격한지라 세조대왕(世祖大王)이 나이 어린데 재주가 준걸스러운 것을 사랑해서 선전관(宣傳官)에 발탁을 하고 모든 군령(軍令)을 출납(出納)하는데 반드시 공을 명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향(響)-산울림)같이 빨리하니 상감께서 허락해서 불가(不可)한 것이 없는지라. 공(公)의 처음에는 이름이 명(蓂)이었는데 상감이 지금의 이름을 하사했으니 대개 소명지의(昭明之義)를 취해서 더욱 힘쓰도록 한 것이라.

 

그 후 중시(重試)에 합격해서 성화정해(成化丁亥-서기1467년)에 이시애(李施愛 亂)가 반란을 일으킴에 공이 어유소 대장(魚有沼 大將)을 따라가서 정벌한 공이 있음으로 당상관(堂上官-정3품)에 승진을 했고 그 해에 또 서쪽으로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했음으로 선릉(宣陵-성종)이 등극해서 원종공신(原從功臣)의 호를 주었고 홍치신해(弘治辛亥-서기1491년)에 비장(椑將)으로서 동여진(東 女眞)의 죄를 묻는데 또한 공로가 있었으니 무릇 네 조정을 섬기면서 내직이나 외직에서 힘을 베푼 것이 사십여년(四十餘 年)이라. 내직으로는 첨지중추 훈련도정 각위장(僉知中樞 訓練都正 各 衛將)이고 외직으로는 우후,절도사,목사,부사(虞侯, 節度使, 牧使, 府使)등은 공이 다 역임한 것이니 또한 공로가 있는 것이다. 공이 고상하고 장부에 기개가 있고 또 경서와 역사를 두루 거쳐서 자못 고금 인물들의 현우(賢愚)와 득실(得失)을 잘 알았으니 진실로 보통 무인이 아니로되 벼슬이 여기에 그치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닐까. 홍치 기미(弘治己未-서기1499년)5월11일에 집안에서돌아 가셨으니 59세이다. 이해 8월 갑진(甲辰)에 광주 무갑산(廣州武甲山)언덕에 장사지냈으니 공은 광주인(廣州人)이라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또한 사람마다 원하는 바라.공(公)의 아버지는 수철(守哲)이니 평안도절도부사(平安道 節度副使)요, 어머니는 증 병조판서(贈 兵曹判書) 이맹상(李孟常)의 女이고 할아버지는 우생(遇生)이니 증 이조참의(贈 吏曹參議)요. 증조(曾祖)는 양중(養中)이니 고려조(高麗朝)형조참의(刑曹參議)라 공이 여흥 백민제(驪興 伯閔齊)의 손자(孫子)인 삼(森)의 여(女)에게 장가들어 일남 일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창언(昌彦)이니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서 김순신의 女에게 장가들어 일남(一男)을 낳았으니 제(躋)이고 女는관찰사(觀察使) 정경조(鄭敬祖)의 아들 승희(承禧)에게 시집가서 2녀(二女)를 낳았다.

 

명(銘)을 짓기를

청년시절에 무과에 합격해 성주(聖主)에 알아줌을 만났도다.

일생(一生)동안 나라를 위해서 어찌 자기몸을 돌보리오.

옛날에 봉군(封君)을 받지 못했으니 정히 운수가 기박하도다.

공이 어찌 훌륭한 업적으로 벼슬이 여기에 그치었는고

공이 세상을 떠난 후에 아들 창언(昌彦)이 능히 선훈(先訓)을 잘 받들고 조정에 벼슬을 해서 정덕병인(正德丙寅-서기1506년)에 중종(中宗)이 등극을 해서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기록되고 추은(推恩)을 해서 공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追贈)했으니 부인 민씨(閔氏)는 오히려 건강하게 살아계신지라. 아들 창언(昌彦)이 봉양을 하는데 풍덕 삭녕(豊德朔寧)두 고을 군수를 하면서 효도로 봉양하는 것이 지극하고 집안에 있을 때에는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서 모든 손자들을 모아놓고 즐거워하니 진신(搢紳-조정에 벼슬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기었다.

 

부인은 성품이 자애롭고 화목해서 이씨(李氏)에게 시집온 후로 며느리의 도리에 결려됨이 없어서 구고(舅姑-시부모)를 섬기는데 순하게 받들어 어김이 없고 친정 부모에게도 효도가 쇠함이 없으니 친척들이 즐거워하고 비복(婢僕-노비)들도 은혜를 입어서 규문(閨門-여자들이 거처하는 안채 집)안이 옹옹(雍雍-화한모양)한 것 같더라. 홀로 된 30년에 가정이 날로 융성해지고 손자들이 안전(眼前)에 가득한데 요사(夭死)하는 슬픔이 없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한 보답이라”고 하더라. 가정을류(嘉靖乙酉-서기1525년)2월27일에 안방에서 고종명을 했으니 수(壽)가 90이라. 그 해 8월 갑인일 에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을 하고 홍치(弘治)12年 8월12일에 비석을 세우다.

  대재학(大堤學) 홍귀달(洪貴達) 지음

  註:가정을유(1525년)에 부인이 졸

  홍치12년(1499년)을미 비석을 세움.

 

 

 

 

 

  전라도(全羅道)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행장

 

공(公)의 휘는 상감이 지금의 이름을 하사한 소(昭)요. 자는 회옹(晦翁)이니 태어나면서(세종23년-1441년)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고 차차 커 가면서 활 쏘고 말 타는데 능숙해서 청년시절에 무과(武科)에 합격한지라 세조대왕(世祖大王)이 나이 어린데 재주가 준걸스러운 것을 사랑해서 선전관(宣傳官)에 발탁을 하고 모든 군령(軍令)을 출납(出納)하는데 반드시 공(公)을 명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향(響)-산울림)같이 빨리하니 상감께서 허락해서 불가(不可)한 것이 없는지라. 공(公)의 처음에는 이름이 명(蓂)이었는데 상감이 지금의 이름을 하사했으니 대개 소명지의(昭明之義)를 취해서 더욱 힘쓰도록 한 것이라.

 

그 후 중시(重試)에 합격해서 성화정해(成化丁亥-서기1467년)에 이시애(李施愛 亂)가 반란을 일으킴에 공이 어유소 대장(魚有沼 大將)을 따라가서 정벌한 공이 있음으로 당상관(堂上官-정3품)에 승진을 했고 그 해에 또 서쪽으로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했음으로 선릉(宣陵-성종)이 등극해서 원종공신(原從功臣)의 호를 주었고 홍치신해(弘治辛亥-서기1491년)에 비장(椑將)으로서 동여진(東女眞)의 죄를 묻는데 또한 공로가 있었으니 무릇 네 조정을 섬기면서 내직이나 외직에서 힘을 베푼 것이 사십여년(四十餘 年)이라. 내직으로는 첨지중추 훈련도정 각위장(僉知中樞 訓練都正 各 衛將)이고 외직으로는 우후,절도사,목사,부사(虞侯, 節度使, 牧使, 府使)등은 공이 다 역임한 것이니 조선 전,중기의 무신으로 또한 공로가 있는 것이다. 공이 고상하고 장부에 기개가 있고 또 경서와 역사를 두루 거쳐서 자못 고금 인물들의 현우(賢愚)와 득실(得失)을 잘 알았으니 진실로 보통 무인이 아니로되 벼슬이 여기에 그치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닐까. 홍치 기미(弘治己未-서기1499년)5월11일에 집안에서 돌아 가셨으니 59세이다. 이해 8월 갑진(甲辰)에 광주 무갑산(廣州武甲山)언덕에 장사지냈으니 공은 광주인(廣州人)이라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또한 사람마다 원하는 바라. 공(公)의 아버지는 수철(守哲)이니 평안도 절도부사(平安道 節度副使)요, 어머니는 증 병조판서(贈 兵曹判書) 이맹상(李孟常)의 女이고 할아버지는 우생(遇生)이니 증 이조참의(贈 吏曹參議)요. 증조(曾祖)는 양중(養中)이니 고려조(高麗朝)형조참의(刑曹參議)라 공이 여흥 백민제(驪興 伯閔齊)의 손자(孫子)인 삼(森)의 여(女)에게 장가들어 일남 일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창언(昌彦)이니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서 김순신의 女에게 장가들어 일남(一男)을 낳았으니 제(躋)이고 女는관찰사(觀察使) 정경조(鄭敬祖)의 아들 승희(承禧)에게 시집가서 2녀(二女)를 낳았다.

 

명(銘)을 짓기를

청년시절에 무과에 합격해 성주(聖主)에 알아줌을 만났도다.

일생(一生)동안 나라를 위해서 어찌 자기 몸을 돌보리오.

옛날에 봉군(封君)을 받지 못했으니 정히 운수가 기박하도다.

공이 어찌 훌륭한 업적으로 벼슬이 여기에 그치었는고

공이 세상을 떠난 후에 아들 창언(昌彦)이 능히 선훈(先訓)을 잘 받들고 조정에 벼슬을 해서 정덕병인(正德丙寅-서기1506년)에 중종(中宗)이 등극을 해서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기록되고 추은(推恩)을 해서 공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追贈)했으니 부인 민씨(閔氏)는 오히려 건강하게 살아 계신지라. 아들 창언(昌彦)이 봉양을 하는데 풍덕, 삭녕(豊德, 朔寧)두 고을 군수를 하면서 효도로 봉양하는 것이 지극하고 집안에 있을 때에는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서 모든 손자들을 모아놓고 즐거워하니 진신(搢紳-조정에 벼슬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기었다.

 

부인은 성품이 자애롭고 화목해서 이씨(李氏)에게 시집온 후로 며느리의 도리에 결려됨이 없어서 구고(舅姑-시부모)를 섬기는데 순하게 받들어 어김이 없고 친정 부모에게도 효도가 쇠함이 없으니 친척들이 즐거워하고 비복(婢僕-노비)들도 은혜를 입어서 규문(閨門-여자들이 거처하는 안채 집)안이 옹옹(雍雍-화한모양)한 것 같더라. 홀로 된 30년에 가정이 날로 융성해지고 손자들이 안전(眼前)에 가득한데 요사(夭死)하는 슬픔이 없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한 보답이라”고 하더라. 가정을류(嘉靖乙酉-서기1525년)2월27일에 안방에서 고종명을 했으니 수(壽)가 90이 라. 그 해 8월 갑인일 에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을 하고 홍치(弘治)12年 8월12일에 비석을 세우다.

 

  註:가정을유(1525년)에 부인이 졸.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공 휘 소 소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