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군 증시호간공(휘 손) 신도비명

 

公諱蓀字子芳姓李氏廣陵人曾祖諱養中高麗刑曹左叅議我朝革命  太祖  太宗累徵不起祖諱遇生司醞主簿  贈吏曹判書考諱守哲平安道節度使  贈議政府左贊成妣陽城李氏觀察使孟常之女夫人益齋李文忠公六世孫曾祖諱擔承政院右副代言祖諱慶尙道觀察使考繼藩龍驤衛攝護軍妣咸安尹氏縣監瀚之女公年少夫人二歲至是後夫人二歲卒並享壽八十二嗚呼公三十而仕奉國五十餘年不敢少懈以躋崇品夫人二十而治家六十餘載罔有一諐永膺厚福人咸曰難矣哉公己卯進士學問之餘又善弓焉馬世祖命補宣傳官叅  成宗朝原從功臣擢庚寅文科累轉禮曹正郞都摠府經歷奉常寺副正調金海府使由承文院判校陞掌隷院判決事自是出入踐履皆一時重任其爲兵馬節度使者曰忠淸咸鏡凡兩道爲觀察使者曰忠淸黃海全羅凡三道叅近侍者再曰弘文館副提學承政院承旨歷諸曹五曰戶曹叅議禮吏曹叅判刑兵曹判書  聖上重興公方判兵曹錄勳賜秉忠奮義靖國功臣號超階崇政封漢山君未幾拜議政府右叅贊年至請老  上命賜几杖敦諭不許旣而陞左贊成貳公弘道朝夕台鉉公益懼盛滿上表乞骸骨至再三愈懇上賜敎書慰勉留之俄進階崇祿公猶執先志辭以疾  上不得已遞爲判中樞府事以漢山君就閑頤養者凡四年而終疾革  上命賜醫藥訃聞輟朝二日官庀喪事太常諡曰胡簡嗚呼公性禀寬厚心存敬謹其居家事親以孝處兄弟以友恩育諸族不間疏遠疾病死喪護救備至常食于家者亦不下數十人家儲屢空略不爲意喜與人論說諄諄不知倦非疾病未嘗一日處於內其居官務持大體不事細察至決大議未嘗少撓其聽訟剔繁撮要剖斷如神吏莫容奸民無隱情其治民寬不至縱威不至苛蘇羸馭梗納之大軌故所至必有聲績盡可稱述聰明之性出於天賦一經耳目終身不忘國家典故文物以至山川道里民情物狀纖悉究到凡有疑質應答如響無少遺失後進者倚以爲蓍蔡焉旣老與柳領相洵安判書琛及諸老之少時同游南庠者結爲九老會每良辰佳節扶携子姪迭相往來爲娛一世稱爲美事夫人生而英肅長而溫懿父母異之曰此女兒不可以儷凡子廣陵之李爲世巨族節度公思惟宗祀之重爲公擇賢家婦得夫人喜曰足以付吾家事無憂矣夫人上奉舅姑旁接娣姒下撫婢僕曲有禮意內外斬斬言不踰梱不以纖芥累君子公之享有多祉終始以禮者亦夫人善承之也旣疾諸子請迎醫行禱夫人曰吾年踰八十榮貴亦至有何所望竟不肯其賢矣哉公以正統己未十二月二十日生正德庚辰正月二十二日卒是年四月初四日葬夫人以正統丁巳七月初十日生正德戊寅二月十八日卒是年四月二十八日葬異墳同塋乃廣州治東無甲山艮坐坤向之原也生四男三女長粹彦登第官至司憲府執義人以公輔期之未四十而歿次純彦內資寺副正次溫彦有才名未第而夭次誠彦登第叅靖國勳以水原府使坐封罷女長適成允祖登第終漢城府右尹次適權肩終司憲府監察次適申儼登第終軍資監正側室子方山忠佐衛司果執義有子曰經掌隷院司議曰緯司憲府監察副正有子曰綱陰竹縣監曰紀登武科鐵山郡守內外孫總七十八人嗚呼積善之報寧有艾耶銘曰執培其根而枝不繁欲流之長在濬厥源廣陵之先是謂德門叅議高蹈匪時之屯不食其報以遺後昆其人伊何爲世達尊其配伊何益齋之孫二大相偶犀帶魚軒衆人所矜公戰以兢保有令聞禮備數登我公之德夫人是承我公之福夫人與膺曰子曰孫繼繼繩繩刻石墓左來者有徵

      正德十五年庚辰五月    日立

容齋  李荇  撰    

 

한산군 증시 호간공 휘 손 신도비명(漢山君贈諡胡簡公諱蓀神道碑銘) 國譯

 

공(公)의 휘(諱)는 손(蓀)이요, 자(字)는 자방(子芳)이시며 성(姓)은 이씨(李氏)니 광릉인(廣陵人)이라. 증조(曾祖)의 휘(諱)는 양중(養中)이시니, 고려(高麗) 때 형조 좌참의(刑曹左叅議)이시고 조선조(朝鮮朝)의 혁명(革命)이 있은 후(後)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이 여러 번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조(祖)의 휘(諱)는 우생(遇生)이니, 사온주부(司醞主簿)시며 이조판서(吏曹判書)의 증직(贈職)을 받으셨고 고(考)의 휘(諱)는 수철(守哲)이니,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로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의 증직(贈職)을 받으셨다. 비(妣)에는 양성이씨(陽城李氏)시니 관찰사 맹상(觀察使孟常)의 女시다. 부인(夫人)은 익재 이문충(益齋李文忠)의 육세손(六世孫)이시니, 증조(曾祖)의 휘(諱)는 담(擔)이며 승정원 우부대언(承政院右副代言)이며 조(祖)의 휘(諱)는 희()니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요, 고(考)는 계번(繼藩)이니 용양위 섭호군(龍驤衛攝護軍)이요, 비(妣)는 함안윤씨(咸安尹氏)니, 현감(縣監) 한(瀚)의 女이다. 공(公)의 나이가 부인(夫人)보다 이세(二歲)가 젊으시니, 부인(夫人)이 돌아가신 후(後) 이세(二歲)간에 공(公)께서 돌아가시니 다 같이 수(壽)를 八十二歲를 누리셨다.

아! 공(公)께서 三十에 벼슬길에 올라서 나라를 받들어 일한 지 五十餘年 감(敢)히 조금도 게으르지 않으시니, 벼슬이 높은 품계(品階)까지 오르셨고 부인(夫人)은 二十에 시집와서 집안을 다스린 지 六十餘年에 한가지 허물도 없이 기리 큰 복을 받으니 사람마다 다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공(公)은 기묘(己卯)에 진사(進士)가 되시고 학문(學問)을 하시는 여가(餘暇)를 타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시니, 세조(世祖)께서 명(命)하여 선전관(宣傳官)에 보(補)하였다. 성종(成宗)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참여(叅與)하셨고 경진(庚辰)년에 문과(文科)에 뽑혀 여러 번 옮겨서 예조정랑(禮曹正郞)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 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으로서 김해부사(金海府使)를 거쳐서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로서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승진하고 이로부터 출입(出入)하고 실천(實踐)하는 것이 모두다 한 때의 중대(重大)한 책임(責任)이었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된 것은 충청(忠淸)·함경(咸鏡)의 양도(兩道)요, 관찰사(觀察使)가 되셨던 것은 충청(忠淸)·황해(黃海)·전라(全羅)의 삼도(三道)요, 근시(近侍)에 참여한 일이 두 번이니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과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요, 여러 조(曹)를 거친 것이 오조(五曹)니 호조참의(戶曹叅議) 예조·이조참판(禮曹吏曹叅判) 형조·병조판서(刑曹兵曹判書)이시다. 성상(聖上)께서 중흥(重興)하시니, 공(公)께서 마침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었다. 훈(勳)을 기록(記錄)하여 병충분전정국공신호(秉忠奮戰靖國功臣號)를 내리시고 숭정(崇政)으로 위계(位階)가 뛰어 한산군(漢山君)에 봉(封)하셨고 얼마 아니 있다가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叅贊)에 배(拜)하시다. 나이 많으므로 쉬기를 청(請)함에 이르니, 上께서 명(命)하여 궤장(几杖)을 하사(下賜)하시고 착실히 타일러서 허락지 않으시며 조금 후 좌찬성(左贊成)에 승진(陞進)시켜 공(公)의 넓은 도(道)를 표하고 조석(朝夕)으로 삼공(三公)의 자리에 같이하게 하시니 공(公)이 더욱 너무 성(盛)하고 가득한 것을 두려워하여 표(表)를 올려 벼슬을 하직하고 평민(平民)되기를 재삼(再三) 더욱 간절히 하니, 上께서 교서(敎書)를 내려 위로 하고 그대로 있기를 권하고 얼마있다가 먼저 뜻을 굽히지 않고 병으로써 사양하니, 上께서 어찌할 수 없어 자리를 바꿔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삼고 한산군(漢山君)으로서 한가로이 몸을 보양케 한지 무릇 四年만에 마치시다. 병환이 중했을 때 上은 의약(醫藥)을 내리도록 명(命)하셨고 부고(訃告)를 들으시고 조회(朝會)를 이일간(二日間) 걷으시고 관(官)에서 장사(葬事)를 도와주도록 하고 봉상시(奉常寺:太常)에서 시호(諡號)를 호간(胡簡)으로 내렸다. 슬프도다. 공(公)의 성품(性禀)은 너그럽고 후(厚)하며 마음가짐이 공경하고 근엄하며 그가 집에 있을 때면 어버이를 섬기기에 효도(孝道)로 하고 형제(兄弟)간에 우애(友愛)로 처(處)하며 은혜로 모든 일가간에 화목하게 지냈고 조금도 소원(黔遠)함이 없으며 병들고 죽고 상 당했을 때 구원해 주는 것이 지극함에 이르렀으며 평상시(平常時)에 집에서 먹고 지내는 사람은 또한 수십인(數十人)에 내려갈 때가 없으니 집안 양식이 여러 번 떨어져도 그런 것은 걱정을 하지 않으며 사람과 의논하기를 기뻐하는데 말씀이 간절하여 권태를 느끼지 않게 하며 질병(疾病)이 아니면 하루라도 내실(內室)에 있지 않았고 관무(官務)를 볼 때는 대체(大體)를 가지고 일은 처리하며 잡다한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큰 의론을 결정하기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소송사를 들을 때면 번거로운 것을 잘라 없애고 중요(重要)한 것만 뽑아서 갈라서 판단하기를 신명(神明)하게 하니 이속(吏屬)들은 간사함을 응납지 못하고 백성들은 원정(怨情)을 품음이 없었다. 치민(治民)하는 데는 관대(寬大)하면서도 방종(放縱)하지 않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가혹하지 않으며 약한 것을 소생(蘇生)시키고 막힌 것을 풀어서 큰 궤도로 돌려 놓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반드시 칭찬받는 성적을 올리어 다들 칭송(稱頌)하였다.

총명(聰明)한 성품(性品)은 천부(天賦)에서 나온 것으로 한 번만 이목(耳目)을 거친 것이면 종신(終身)토록 잊지 않으니, 국가(國家)의 역사적인 문화물질(文化物質)로부터 산천(山川)과 도리(道里)며 민정(民情)과 물상(物狀)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모두 연구하여 무릇 질의(質疑)를 하는 일이 있으면 응답(應答)하기를 즉각에 산울림같이 하여 조금도 실수가 없으니 후진자(後進者)들이 모르는 것을 점쳐서 알아 맞추듯이 물어 보더라. 늙은 후(後)에 류영상 순(柳領相洵)과 안판서 침(安判書琛)과 및 여러 노인 중(老人中)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南庠)를 지내던 사람들로 구로회(九老會)를 맺어서 매양 양진(良辰)과 가절(佳節)에 자질(子侄)들의 손을 잡고 유쾌하게 서로 왕래(往來)하며 즐겨 놀고 지내니, 一世에서 아름다운 일이라 칭송(稱頌)하더라. 부인(夫人)께서는 나서부터 영특하고 엄숙하게 자라니, 온순(溫順)하고 아름다운 지라. 부모(父母)가 신기하게 생각하며 말하기를 이 여아(女兒)는 보통 사나이와는 짝지을 수 없다 하더니, 광릉(廣陵)의 이씨(李氏)가 대대(代代)로 내려오는 거족(巨族)으로서 절도공(節度公)이 종사(宗祀)의 중(重)함을 생각하고 공(公)을 위(爲)하여 어진 맏며느리감을 고르더니, 부인(夫人)을 만나서 말하기를 족(足)히 우리집안 일을 맡겨서 근심할 바 없을 것이라 하였다. 부인(夫人)은 위로 구고(舊姑)를 받들고 곁으로는 시누이와 동서를 접(接)하며 아래로 비복(婢僕)을 어루만지는데 정의(情意)를 다하니, 안팎으로 깔끔하며 말이 안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잡다한 일로 남편을 괴롭히지 않으니, 공(公)께서 많은 복을 누리며 시작부터 끝까지 예(禮)로서 살아간 것이 또한 부인(夫人)께서 잘 뜻을 받들어 드린 데서 온 것이다. 병환이 드시니, 모든 아들들의 의원을 청하고 하늘에 빌 것을 행(行)하고자 하니, 부인(夫人)이 말하기를 내 나이 八十이 넘었고 영귀(榮貴)하게 살아 왔는데 무엇을 바라겠느냐 하고 마침내 즐겨 허락하지 않으니 그 어지심이 이 같으시도다.

공(公)은 정통 기미(正統己未)년 十二月 二十日에 생(生)하여 정덕 경진(正德庚辰)년 正月 二十二日에 졸(卒)하시니, 이해 四月 初四日에 장(葬)하고 부인(夫人)은 정통 정사(正統丁巳)년 七月 初十日에 생(生)하여 정통 무인(正統戊寅)년 二月 十八日에 졸(卒)하니, 이해 四月 二十八日에 장(葬)하니, 이분동영(異墳同塋)인바 광주(廣州) 땅 동(東)쪽 무갑산(武甲山)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언덕이다. 四男三女를 두니, 장(長)에 수언(粹彦)은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儀)에 이르니 사람들이 공(公) 보(輔)로 기대하였더니, 四十이 못되어서 조몰(早沒)하고 차(次)에 순언(純彦)은 내자시 부정(內資寺副正)이요, 차(次)에 온언(溫彦)은 재명(才名)이 있었으나 과거(科擧) 못 보고 일찍 세상을 뜨고 차(次)에 성언(誠彦)은 등제(登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였으며 수원부사(水原府使)이셨고 女에 장(長)은 성윤조(成允祖)에게 시집가니, 과거에 올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하였고 다음은 권견(權肩)에게 시집가니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요, 다음은 신엄(申儼)에게 시집가니 과거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이라 측실(側室) 아들에 방산(方山)은 충좌위 사과(忠佐衛司果)요, 집의(執義)의 아들은 경(經)이니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요, 다음 휘(緯)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요, 부정(副正)의 아들은 강(綱)이니 음죽현감(陰竹縣監)이요, 다음은 기(紀)니 무과(武科)로 철산군수(鐵山郡守)요 내외손(內外孫)이 모두 七十八人이라.

아! 적선(積善)의 보답(報答)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명(銘)하니 왈(曰),

 

누구든지 그 뿌리 북돋으면 그 가지 번성하지 않으랴.

흐르는 물 길고길게 하려면 그 근원 깨끗해야 하느니

광릉땅에 자리잡은 그 선조 이 아니 이른바 덕문인가

참의께서 절의지켜 은둔함은 그 시대의 둔색함이였다네

그 오답 받지 못하여 후손에게 내려 주었네

그 사람 그 어찌 되었던고 수(壽)와 덕(德)과 벼슬 높았네

그 부인 그 어찌 되었던고 익재 선생 손녀딸 이시라네

훌륭하신 두 분이 서로 만나 벼슬높아 영광 누렸네

모든 사람 자랑삼아 좋아하나 공께서는 조심하고 경계하였네

아름다운 명성을 보존하고 예우받고 자주 등용되었고

우리공의 높으신 그 덕은 부인께서 이것을 이어받고

우리공의 크고 큰 그 복은 부인께서 다같이 받으셨네

훌륭한 그 아들 그 손자여 이어서 내리고 또 이었네

비석에 글로 새겨 세워놓고 오는 사람 다같이 고증하리.

 

    정덕(正德) 十五年 경진(庚辰, 一五二○) 五月    日

용재(容齋) 이행(李荇) 지음

 

 

 

 

 

  한산군 증시호간공(휘 손) 행장

 

자(字)는 자방(子芳), 세종(世宗) 기미(己未, 一四三九)年 十二月 二十日生으로 성종(成宗) 경인년(庚寅年)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고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한산군(漢山君)에 봉(封)해지시고 시호(諡號)가 호간(胡簡)이라 내려졌다. 공(公)은 총명(聰明)함이 하늘이 낸 듯 하고 국사(國事)의 살림에 있어 신(神)과 같았으며, 전물(典物)과 산천도리(山川道理)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연구(硏究)하여 아시니 一世가 다 점(占)을 치듯이 잘 안다 하였다. 중종(中宗) 경진(庚辰, 一五二○)年 正月 十二日卒하시니 향년(享年) 八十二이고 묘(墓)는 선고묘하(先考墓下) 간좌(艮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이고 부(父)는 부장 계번(部將繼蕃)으로 익재 문충공 제현(益齋文忠公齊賢)의 六世孫이며, 세종(世宗) 정묘생(丁卯生) 중종(中宗) 무인(戊寅) 二月十八日卒하시고 묘(墓)는 쌍분(雙墳)이다. 아들은 장남(長男) 수언(粹彦), 차남(次男) 순언(純彦), 삼남(三男) 온언(溫彦), 사남(四男) 성언(誠彦)이며 女는 성윤조(成允祖) 권견(權肩) 신엄(申儼) 세분이다.

 

 

 

 

 

  한산군 증시호간공(휘 손) 공신록

 

中宗朝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燕山政亂에宗杜ㅣ幾危하야正德元年九月二日에朴元宗等이廢燕山하고立 中宗錄勳

 

  一等五員

朴元宗(平城府院君)    柳順汀(菁川府院君)    成希顔(昌山府院君)    洪景舟(南陽君)    張 珽(河源君)

 

  二等十三員

李孝誠(雲水君)    沈順經(靑城君)    邊 脩(原川君)    崔漢烘(鷄林君)    尹衡老(鈴陽君)    曺繼商(昌寧君)    柳 洵(文城府院君)    金壽童(永嘉府院君)    金 勘(廷昌府院君)    李 誡(雲山君)    李季男(平原君)    具壽永(綾川君)    李汰歲(德津君)

 

  三等三十一員

高守謙(開城君)    沈 亨(豊寧君)    黃 坦(長原君)    柳世雄(興陽君)    柳繼宗(菁陽君)    尹士貞(揣原君)    李 [艹+深](河源君)    李 軾(星山君)    閔懷發(驪興君)    閔懷昌(驪興君)    具賢輝(綾城君)    白壽長(貞海君)    李克正(蚊川君)    申 浚(高陽府院君)    金友增(淸平君)    李碩蕃( 城君)    鄭眉壽(海平府院君)    朴 楗(密原府院君)    宋 藁(南原府院君)    姜 渾(晋川君)    韓 恂(西原君)    李 蓀(漢山君)    柳 涇(高興君)  金壽卿(永陽君)    鄭允謙(淸溪君)  金敬義(支山君)    李 攷(海豊君)    沈 貞(花山府院君)    尹陽老(坡川君)

 

  四等五十八員

卞 儁(草溪君)    邊士謙(原陽君)    韓叔昌(西平君)    朴而儉(順城君)    柳 濚(晋陽君)    成希雍(昌成君)    尹 衡(南原君)    辛允文(寧城君)    洪景霖(益原君)    姜 貴(永善君)    尹金孫(坡城君)    柳應龍(文原君)    尹 坦(鈴平君)    申壽麟(平原君)    趙世勛(豊壤君)    韓世昌(西原君)    李孟友(固城君)    尹汝弼(坡原府院君)    李盛同(安賢君)    李宗義(咸平君)    許 礦(高陽君)    李翰允(全城君)    柳 泓(晋山君)    李 夔(遼山君)    成 慓(昌成君)    趙元倫(馬川君)    金 瑄(咸原君)    閔孝曾(驪平府院君)    朴永昌(天嶺府院君)    金克成(光城府院君)    黃孟獻(長原君)    成夢井(夏山君)    李世應(咸安君)    張漢公(永山君)    韓斯文(西川君)    金 任(鷄城君)    曹繼殷(昌城君)    李 讜(遂安君)    朴而溫(昇平君)    李誠緊(漢平君)    辛殷尹(鷲山君)    尹熙平(海陽君)    康允熙(信平君)    李 敞(平川君)    崔有井(吉城君)    蔡 壽(仁川君)    禹 鼎(禮安君)    文 致(文原君)    徐敬生(峰城君)    金繼恭(加平君)    金叔孫(興安君)    金 銀(公山君)    任元山(保安君)    權 釣(水昌府院君)    金俊孫(燕城君)    金 부碔(豊陽君)    潘佑亨(岐城君)    李 坤(延城君)

  

 

 

 

 

 

  한산군 증시호간공(휘 손) 소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