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공

호간공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 선생에 대한 연구

 

 

초당 정영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필자가 이양중선생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토요저널>의 요청으로 ‘우리고장 문화유적 답사기’를 연재 집필하면서부터다. 2000년 2월 22일자 <토요저널>에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중심으로 조사연구한 내용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02년 강동구지를 편찬하면서 『江東區誌』인물편에 이양중선생을 기술하였으며, 2010년 강동문화원에서 발간한 『강동의 역사와 문화』에 이양중선생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2011년 『賞鶴學術會誌』‘구암서원 연구의 기초’ 논문에 같은 내용을 수록하였다.

 

2004년부터 강동문인회에서는 『강동문학』에 강동을 빛낸 역사인물을 한 분씩 선정하여 특집으로 재조명하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2010년에 이양중 선생을 선정하였으나 석탄공종회의 사정으로 결열되었다가 2013년도 강동의 역사인물로 재조명하게 되었다.

 

2012년 3월 27일 석탄공종회를 방문하였더니 이종덕(李鍾德) 석탄공종회 회장이 “우리 조상을 강동문인들이 재조명하여 주신다니 이보다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면서 석탄공의 묘소 고유제와 추모시 낭송회를 개최하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적극 협조하겠다 하였다.

  

<사진3. 고덕산 정상 간판>

 

그러면서 고덕산 93번지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고덕산에 얽힌 이야기’(이양중 선생과 이시무 정려문) 입간판이 없어진 것을 개탄하면서 다시 설치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고덕산 93번 정상은 사유지여서 불가하고 오히려 돌여울(石灘)에서 가까운 ‘고덕생태공원’에 돌비(碑石)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해 주었다. 왜냐하면 이양중 선생께서 돌여울 근처에서 태종과 만나 회포를 풀었고, 호(號)도 석탄(石灘)이라 짓지 아니하였는가.

 

 2012년 3월 31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신월리 무갑산 기슭에 있는 이양중 선생 묘소를 두 번째 찾아보았다. 12년 전에는 후손인 이종완씨의 안내로 쉽게 찾아보았는데 이번에는 혼자서 찾느라고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옛날에는 한적하던 신월리가 신축건물과 공장건물로 가득 차 있고 새로운 길이 생겨 있어 이 골목 저 골목을 승용차로 돌아다니다가 신도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신도비 근처에 고덕재(高德齋)가 있고 산기슭에 묘소가 있다. 성묘를 마친 후 고덕재 옆에 살고 있는 종손인 이창희(李昌熙)씨 집을 찾아가 의문점을 묻고 싶었는데 이창희씨가 출타하고 없어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이양중 선생은 문집이나 다른 자료가 없음이 안타까웠다. 돌여울이 하일동(지금의 강일동)에 위치해 있고 하일동 평촌(벌말)에 그의 후손 광주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돌여울(石灘) 건너편 가까운 곳에 왕숙천(王宿灘)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양중 선생은 고덕산 기슭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묘소는 하남시 입구 수리골에 있었는데 도시화가 되면서 지금의 초월면 신월리 무갑산으로 이장하였다.

 

 

1. 고려 충절신(忠節臣) 이양중 선생

 

<사진4. 이양중 선생 묘소>

 

이양중은 고려조 말기의 문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참의에 올랐으며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서견(徐甄), 이방원(李芳遠 : 太宗)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우왕은 요동 정벌을 하려고 매일같이 회의를 하였다. 이 때 이양중은 극히 간하기를 지금 국내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니 소장지변이 생길까 염려이니 요동을 침이 불가라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 때 조민수(曺敏修)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이양중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이태조 혁명초에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 남한산하(지금의 고덕산)에 들어가서 모든 인사를 끊고 고죽부(孤竹賦)와 경송시(勍松詩)를 지으니 그 글 뜻이 매우 강개울분하여 보는 사람이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하루는 이색이 귀양이 다 풀려서 적소로부터 밤에 이양중의 집으로 왔다. 서견은 이미 와 있거늘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되 국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리가 동시에 사직하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어 이런 변을 안 볼 것을 하고 길재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그 무렵 태조가 이양중을 불러 벼슬을 주어 받지 않으면 치죄하리라 하니 이천우(李天祐) 등이 태조에게 말하되 이양중은 고려조 때 수절 대신이요 고집이 대단하니 벼슬로도 달랠 수 없고 죽여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이양중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이양중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 버렸다. 태종은 이양중에게 한성판윤을 주어도 받지 않으므로 친히 남한산 아래 돌여울에 와서 만나 보았다. 이양중은 평복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배알하고 술과 안주를 드렸다. 태종은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 하여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酬酌)하여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嚴子陵)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한(漢)나라 왕도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는가?” 하니 이양중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오.”하고 인하여 길재가 황화(黃花)로 백이(伯夷)를 제사지낸 일을 말하니 태종이 이양중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였다. 신하들이 이양중을 탄핵하되 “이양중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 죄 가장 큽니다,” 태종이 가로되 “무릎을 맞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 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이양중을 헐뜯지 못하였다.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위에 친필로 시를 써서 이양중에게 보냈다. 그 글 뜻은 ‘술 석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천년(富春山千年)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시키지 못 하리로다.’ 태종은 즉시 이양중의 큰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주부(司?主簿)를 특배하였다.

 

동생 이양몽(李養蒙)은 벼슬이 형조판서였는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항절신으로 관직을 버리고 남한산 아래 수리골(현 하남시 덕풍동)로 은거하였다가 태종이 이양중을 찾아오자 원적산으로 피신하였다.

 

이양중은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묘는 수리골에서 광주시 초월면 무갑산으로 1989년에 이장하였다. 고덕재(高德齋)와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찬(撰)하였다.

 

명(銘)하여 가로되

 

公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과 같고 公의 높은 절의는 태산 교악과 같도다.

周나라 같이 융숭하고 漢나라 같이 창성함에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가는데 저 멀리 나는 기러기는 어찌할 수 없구나. 성군(聖君)의 도량이 아니였다.

公을 뉘가 이루리. 저 높은 바람 엄자릉과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길이 끼쳐주어 떨어드림이 없도다.

공경히 이 글을 새기노라.

 

 

2. 석탄 이양중 선생 묘비문(石灘公諱養中墓碑文)

 

<사진5. 신도비>

 

고려조 때 통정대부 형조좌참의 이공(李公) 휘는 양중이다. 이태조 혁명 당시 신하되기를 거절하고 광주 남한산하에 은퇴하여 부르는 영에 응하지 않고 귀양을 갈지라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다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평소 때의 우의로 특별히 가선대부 한성판윤직을 주어도 받지 않으므로 태종이 오히려 광주에 가서 옛 정을 베풀거늘 공이 평복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배알하고 술과 안주를 드리니 태종이 기꺼이 놀다가 환궁할 뿐이요. 마침내 그 굳은 의지는 돌이키지 못하고 다만 석탄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관직을 내려 장려하고 석탄에게는 궁중선물과 안부를 자주하나 다만 시(詩)를 올려 사례하니 무릇 석탄의 굳은 지조는 옛날 백의숙제 뜻으로 엄자릉의 자취를 따르니 백세하(百世下)에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고 태종의 융숭한 은혜 또한 옛날 광무황제에 지지 않으니 그 세교(世敎)에 관계됨이 심히 중한지라, 태사씨(太史氏)가 사책(史策)에 자세히 적어 자릉(子陵)과 더불어 무궁하게 아니 전하겠는가.

 

공의 손자 찬성(贊成) 한산군(漢山君)이 자손이 오래되면 선조의 뜻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막내아들 부사 성언(誠彦)과 손자 현감 망(網)을 시켜 그 친구 의성 김안국(金安國)에게 부탁하여 공의 사적을 대강 적어 돌에 새겨 뒷사람에게 끼치게 하니 내가 이르되 대절(大節)이 이같으니 다른 것은 대게 추상할 수 있다. 가범(家範)을 지켜 관작이 혁혁하고 내외증현손(內外曾玄孫)이 사백여명이 되니 이 어찌 하늘이 공의 덕을 보답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因)해 명(銘)하여 가로되,

 

공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松柏)과 같고 높은 절의(節義)는 태산 교악과 같도다.

주(周)나라 같이 융숭하고 한(漢)나라 같이 창성(昌盛)함에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가는데

저 멀리 날으는 기러기는 마침내 어찌 할 수 없구나.

성군의 도량이 아니었나 공을 뉘가 이루리.

저 높은 바람 엄자릉(嚴子陵)과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기리 끼쳐주어 떨어뜨림이 없도다.

공경히 이 글을 새기노라.

정덕 십삼년 겨울에 대광보국숭록대부 한산군 손(蓀) 입비

모재 김안국 지음

 

 

<사진6. 비각>

(원문)

石灘公(諱養中)墓碑文

故高麗通政大夫刑曹左參議李公諱養中當我,太祖革命之初抗不臣之節遯居廣州南漢山下不應徵,命至被竄謫而不少屈及,太宗卽位以龍潛故人眷遇甚至,特拜嘉善漢城尹亦不受,太宗常廣州召與道舊,公野服携琴謁拜獻壺酒盤魚,上相見歎然而罷竟不能奪其志,特官其長子遇生以?之常分,御 廚珍羞存問不絶只以詩謝之夫公以首陽之志蹈當春之?百載之下足可想像其爲人而又有以見我,太宗之人能無讓於光武其有關,於世敎甚重抑不知太史氏,能詳書于策以與子陵同垂諸無窮否乎,公之孫贊成漢山君,公懼子孫久而不識先祖之志,命季子府使誠彦及孫前縣監網囑,其友義城金安國略敍其事將表?石以遺後,余謂公之太節如是他可槪見,公之子孫世守家範貴顯奕葉朱紫溢門,內外曾玄孫總四百有餘人豈天以此報公之德也.歟因銘以贊之曰.公志之貞凌冬松栢,公節之高橫空喬嶽,周隆漢昌附翼攀麟,冥冥鴻鵠終難可馴,聖量之大非公執成,高風嚴瀨萬古爭聲,惟忠惟孝以永其胎,雲仍勿墜敬悚刻辭.

  正德十三年冬曾孫秉忠奮義靖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漢山君蓀立碑

慕齋 金安國 撰

 

 

3. 석탄공 사적부설(史蹟附設)

 

<사진6. 비각>

 

석탄공은 고려조 말기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이색과 정몽주 길재 서견 및 태종과 형제의 의를 맺고 고려 공민왕을 섬기다가 우왕 때에 요동 땅을 치려하거늘 석탄이 극히 간하기를 지금 국내 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니 소장지변이 생길까 염려로다. 요동을 침이 불가하다고 극히 반대하되 왕이 듣지 않으니 때마침 조민수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석탄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 보내었다. 이태조 혁명초에 석탄은 이미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 남한산에 들어가서 모든 인사를 끊고 고죽부(孤竹賦)와 경송시(勍松詩)를 지었다. 그 글 뜻이 극히 강개분울하여 보는 사람으로서는 슬픔을 참기 어렵더라. 석탄은 항시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하여 어찌하리요 하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다가 문득 삼각산을 바라보며 탄식하되 간신 조민수여 나의 한이로다. 주먹을 쥐고 이를 갈며 평상을 치니 손바닥이 다 터졌더라.

 

하루는 이색이 귀양이 풀려서 적소로부터 밤에 석탄의 집으로 왔다. 서견(徐甄)은 이미 와 있거늘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되 국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리가 동시에 사직하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어서 이런 변을 안볼 것을 하고 길재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길재는 이미 산중으로 갔으니 과연 선각자로다. 즉시 이색은 오대산으로 가고 서견은 금천장으로 도망하였다.

 

그 무렵에 태조가 석탄을 불러 벼슬을 주어 받지 않으면 치죄하리라 하니 이천우(李天祐) 등이 태조에게 말하되 이모(이양중)는 고려조 때 수절대신이요 고집이 대단합니다. 벼슬로도 달랠 수 없고 죽여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태조가 그 말을 듣고 끝내 석탄을 부르지 않다가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석탄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석탄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버렸다.

 

태종은 석탄을 불러도 병을 핑계삼아 안 올 것을 알고 친히 남한산 아래로 와서 석탄을 만나보고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하며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하여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한(漢)나라 왕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은가? 하니 석탄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요. 하고 인하여 길재가 황화(黃花)로 백이(伯夷)를 제사지낸 일을 말하였다. 태종이 석탄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였다. 대신(臺臣)들이 석탄을 탄핵하되 석탄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 죄가 가장 크다 하였다. 태종이 가로되 무릎을 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석탄을 헐뜯지 못하더라.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뒤에 친필로 시를 써서 석탄에게 보내었다. 그 글 뜻은 ‘술 석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富春山) 천년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 시키지 못하리로다’ 했더라. 즉시 석탄의 큰 아들 우생에게 사온주부(司?主簿)를 특배하였다.

 

석탄의 동생 이름은 양몽(養蒙)이요 벼슬은 판서였는데 명석한 분이다. 먼저 고려의 국운이 다 됨을 알고 남한산장으로 도피하여 농부가 되었다가 이조 혁명 후에 왕촉전(王蜀傳)을 지어 석탄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형은 정몽주와 같이 고려조를 섬기다가 정몽주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은 아직 생명을 보존하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가십니까?” 하였다.

 

석탄공 종중이 이날부터 만권 서책을 다 한강에 던지고 의관을 벗어 불사르고 영영 산에서 나오지 않고 남녀 혼인을 다 전조 대신들과 하고 이조 대신들과는 절대 상대하지 않았다. 지금 광주 사람들은 석탄 형제의 굳은 절의를 옛날 백이와 숙제에 비하고 경기도 광주 구암에 서원을 짓고 둔촌선생과 석탄선생을 봉향(奉享)하였다.

 

 

4. 석탄공 행장(行狀)

 

<사진7. 고덕재>

 

석탄공께서는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벼슬에 오르셨으며 고려조의 강직한 충절신으로 명성이 높으셨다.

 

당시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가 대립하고 있었던 상황하에서 요동정벌을 하려고 매일같이 궁중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이때 석탄공께서는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강대해져서 소장지변(蕭牆之變)이 일어날 우려가 있음으로 요동의 정벌은 불가하다고 직간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아니 하였다.

 

그 무렵 석탄공께서는 길재, 이색, 서견, 정몽주, 이방원과 더불어 6결의형제를 맺고 지내오던 중이었다. 얼마후 공의 예견과 같이 대신들 사이에 알륵이 극심하더니 드디어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석탄공께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당시 고려조 칠십이현(七十二賢)의 충절신들과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세상과는 일체 연락을 끊고 살았다.

 

그 후 남한산하로 퇴거한 석탄공에게 이방원은 수차에 걸쳐 조선에 협조할 것을 간청해 왔으나 공께서는 응하지 않았다. 후일 이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공에게 한성판윤으로 보위할 것을 전하러 왔으나 공께서는 사양하시고 나오지 않았다. 태종은 직접 남한산하로 공을 찾아 갔는데 공은 야복(野服)에 거문고를 들고 왕을 맞이하였으며 옛 벗의 예로 대접하였다. 이때 태종은 시를 지어 그대가 어찌 옛날의 우정을 잊었는가?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나 한(漢)나라의 왕도정치도 모두 우의에서 이루어 왔지 않았던가 하니 공(公) 또한 시로써 답하기를 옛나의 우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의 수작(酬酌)이 있으리오 하였다. 왕도  공의 굳은 절개를 이해하고 밤을 새우며 우정을 나누었다.

 

환궁한 뒤에 대신들은 석탄공을 탄핵하여 간하기를 “일개 필부로써 군주의 권위를 무시한 죄과는 가장 크옵니다” 하며 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태종이 대노하며 가로되 “무릎을 마주하며 술을 함께 마시는 것은 우정의 두터움이다. 자고로 왕자에게는 이러한 굳은 친우가 있었느니라”고 말씀하였다. 그 이후로는 조정대신들도 공의 언행에 대하여 일절 왈가왈부 하지 않았다.

 

태종은 공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주부(四?主簿)의 벼슬을 내리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태종이 남한산하에 은거하고 있던 공을 찾아 하루 밤을 숙박하고 갔다 하여 왕숙탄(王宿灘)이라 전해오고 있다.

 

후일 태종이 승하한 후에 태종이 묻힌 헌릉(獻陵)에 백발에 흰 옷차림의 한 노인이 찾아와 슬프게 호곡하면서 술잔을 드리고 정성껏 제를 올리던 그 분이 바로 석탄공이었다. 이러한 일이 사사로운 일 같으나 공과 사를 분명하게 가르쳐준 충절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강동구 고덕동은 석탄공과 암탄공 형제분이 사시던 곳으로 두 분의 높은 음덕을 기린다는 의미로 고덕(高德)이라 이름 붙혀 진 것이다. 고로 고의 재사명(齋舍名)을 고덕재(高德齋)라 명명하였으며 그 당시 광주의 사림들은 공을 각별히 흠모하여 암사동 구암서원에 주벽으로 배향하였다.

 

공의 묘소의 초장지는 덕풍리 수리골이었으나 묘소 주변의 도시개발로 인하여 1983년 3월에 많은 석탄공 후손들이 영면하고 계시는 유서깊은 무갑산 기슭 양지바른 명당터에 천묘 이장하였다. 1989년 9월 3일에는 그토록 열망하던 재사(齋舍)를 완공하고 그 이름을 지고지충(至高至忠)의 높은 충절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하여 ‘高德齋’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탄공 재사 상량문(上樑文)을 대들보 내에 봉안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탄공의 재사명을 고덕재라 명명했네

고(高)와 덕(德)은 높음과 큰 것을 이름이니

고덕재는 공의 덕을 숭모코자 함이로세

무갑산 힘찬 줄기 여기에 뻗어내려

정기어린 능선을 만들고 멈추었네

좌청룡 우백호가 유택을 둘러쳤네

안산과 조산이 적당하게 자리했네

초장지 수리골을 개발로 잃었기에

무갑산 8대 명당 유택으로 마련하니

홍복이요 음덕임을 누구인들 부인할까

신라 충신 후손으로 욕위향리(欲爲鄕吏) 하였기에

얼마나 많은 세월 와신상담 하였던가

후손에겐 천한 신분 물려주지 않으려고

호시탐탐 실지회복 꿈에선들 잊었을고

공의 대에 이르러서 소망이 성취되어

옥관자 형조참의 당당한 경대부(卿大夫)네

인품이 순후하고 학덕 또한 높았기에

방원과 결의형제 고려사직 지키더니

방원이 역성혁명 조선조 건국했네

미련인들 없었으며 갈등인들 없었을까

그러나 공에게는 불사이군 절개만이

위신의 도리이며 고려인의 길이라고

유회(柔懷) 뿌리치고 두문동에 숨었네라

태종이 즉위하여 한성판윤 자리 놓고

공에게 입조하길 간곡히 권했건만

끝내는 협조하길 완곡히 거부했네

태종이 공을 아껴 삼고초려 할량으로

광주땅 우거지로 어가 몰아 찾았건만

군신주의(君臣主義) 없다하며 옛 정으로 대하셨네

장하도다 충신후예 충절을 계승했네

늦으나마 후손들이 종의(宗意)를 모았기에

양지바른 명망터에 재사를 창건코자

재목깎는 자귀소리 무갑산에 메아리쳐

공의 높은 충절처럼 천지를 진동하네

재사(齋舍)가 완공되면 시월 상달 시사(時祀)에는

후손들 여기 모여 공의 고덕 기리면서

정성껏 제사하고 숭조돈목(崇祖敦睦) 할지리니

고덕재는 더욱더욱 고덕전(高德殿)이 될 것이고

후손들은 해동갑문(海東甲門) 옛 영화 찾으리라.

戊辰 가을에 19代 傍孫 昶淳 謹撰

 

 

5. 고송정 회동지사 련구(孤松亭會同志士聯句)

 

<사진8. 글씨>

 

故國三杯酒

慇懃共

옛 나라의 석잔 술에

은근하게 모였도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瘐篁仰雪穩

晩菊傲霜

약한 곳에 눈이 내려도 제대로이고

늦은 국화 서리에도 향기롭네.

고송(孤松)

허도(許도)

天日天無二

人生儘有三

하늘에는 해가 두 개 있을 수 없고

인생에는 세 강영이 엄연히 있네.

호은(浩隱)

길재(吉再)

剛薇澄肺腑

禿抑織람毿

고사리는 사람 폐부 맑게해주고

낙엽진 버드나무는 축 늘어졌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珍中無瑕玉

浮沉不染藍

진귀하고 흠없는 구슬은

부침해도 티 끝에 물들지 않네.

둔촌(遁村)

이집(李集)

孤臣餘故舊

良友盡西南

고신만은 옛 친구로 남았는데

어진 친구 사방으로 다 흩어졌네.

참의(參議)

이양중(李養中)

袞銊春秋義

農桑日夕談

나라일은 추추대의 본받고

농사일은 밤낮으로 말해야지.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愴懹憑落照

跧蟄掩松菴

슬픈 회포 낙조에 싣고

엎드려서 솔 암자에 묻히겠노라.

사인(舍人)

서견(徐甄)

 

 

6. 태종의 위로 서찰(慰勞書札)

 

<사진9. 고덕재 정문>

 

석탄공께서는 1392년 7월 17일 고려가 패망하고 이성계가 나라를 창건하여 태조의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여말충신(麗末忠臣)들과 함께 개성 근처의 두문동으로 들어가신 72현 중의 한 분이시다. 공께서는 고려충신으로써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태종으로부터 수차에 걸쳐 부르심을 받았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굳게 지키시며 거절하셨다.

 

그러나 태종이 직접 어가를 타고 지금의 고덕동에서 내려와 또다시 권유하였으나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시므로 태종이 환궁하여 거문고에 ‘白酒三盃彈琴一曲富春千載嚴瀨高節終不能屈’이라는 시를 친필로 써서 하사하시므로써 공의 높은 충절을 치하 격려하셨다.

 

이 시의 뜻은 ‘술 석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 천년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시키지 못하리로다’ 라는 내용이다.

 

 태종은 그 후 충절을 굳게 지키며 살아오신 석탄공과 암탄공 두 분의 지고지충(至高至忠)한 덕망을 오래토록 기리기 위해 석탄공이 살고 있는 곳을 고덕리(高德里)라 부르게 하였다.

 

 

7. 맺는말

 

석탄 이양중(石灘 李養中) 선생의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 본관은 광주(廣州)다. 고려의 형조참의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군수인 그의 아들 수생(遂生)과 같이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두문동(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 실기(杜門洞 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그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이를 두문동이라고 부르는 곳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두문동 72현을 조선 조정에서 회유하였으나 듣지 않자 장살(杖殺)을 감행하였다.

 

선생은 고향(지금의 강동구)으로 퇴거하여 울분으로 지내던 중 결의형제를 맺은바 있던 이방원(李芳遠)이 태종(太宗)이 되자 직접 회유 설득하여 조정에 불러들이고자 결심하고 친히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왕이 온다고 하자 아우인 암탄 이양몽(巖灘 李養蒙)은 광주 원적산하(元積山下)로 피하고 선생 혼자서 입던 옷 행색 그대로 왕을 접대함에 탁주를 따라 권하고 자기는 거문고를 튀기니 왕과 신하의 예는 전혀 없고 한낱 필부들의 모습 그대로인지라 수행했던 신하들이 대노하여 왕을 능멸하는 역신이니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태종이 큰 소리로 제지하고 "이 분은 진정 나의 벗이다"하면서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제수하고 출사할 것을 간곡히 권유했으나 그의 굳은 의지를 돌리지 못하고 환궁하였다. 석탄의 높은 지조를 찬양하며 사는 곳을 고덕리(高德里)라 명명하도록 하여 지금의 고덕동의 유래가 되었다.

 

필자는 발길을 돌려 오래만에 빈양(지금의 고덕생태공원)을 찾아가 바위 절벽에 서서 고려 절신(節臣) 이양중 선생과 태종이 만나던 장소가 어디쯤인가를 살펴보았다. 빈양은 올림픽대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각급학교의 소풍장소이기도 하였다. 특히 여름철에는 강수욕을 즐기고 천렵을 하고 야영을 하던 곳인데 지금은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가 없는 외딴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도 빈양은 우리고장에서 가장 산수(山水)가 빼어난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옛날에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강을 건널 수 있는 돌여울에서 말조개를  잡기도 하고 어항을 놓아 피라미와 매자를 많이 잡았었다.

 

선생은 이 돌여울을 호로 지어 석탄(石灘)이라 부르는 뜻을 알겠다. 강을 따라 걸었다. 강동대교를 건너 왕이 이양중선생을 만나기 위해 유숙하였다는 왕숙탄(王宿灘)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선생의 문집이 남아있지 않음을 서글퍼 하였다.

 

강동문인들과 후학들은 많은 연구를 하여 이양중선생에 대한 논문과 시문을 발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동안 필자가 연구한 내용들을 모두 발표한다.

 

 

 

 

 

석탄공

호간공

 

호간공(胡簡公) 이손(李蓀)선생에 대한 연구

 

정영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2014년 강동의 역사인물로 한산부원군 이손선생을 선정하게 되었다. 선생의 증조부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선생을 2013년 역사인물로 재조명하였는데 광주이씨 문중에서 이양중선생 후손 중 가장 훌륭한 인물인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을 재조명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사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두 차례 땀을 흘리면서 무갑산 산소와 광주문화원을 방문하였다. 이창희 종손 집에 보존하여 내려오던 문집과 여러 문헌들이 한국전란으로 인하여 모두 소실(燒失)되고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광주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박광운선생의 도움으로 『廣州市史』와 『廣州金石文大觀』을 얻어 간신히 본 연구를 하게 되었다.

 

참고문헌과 구술을 중심으로 미흡한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놓으니, 본 논문을 참고하여 강동문인들은 추모시문을 창작하여 2013 년 10 월 19일 한산부원군 묘소에 가서 고유제 및 추모낭송회를 성대하게 거행하기를 바란다.

 

 

1.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이손(李蓀)

 

한산부원군 영정

 

이손(李蓀) 1439(세종 21)~1520(중종 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방(子芳). 초명은 명(蓂)이었는데 세조가 손(蓀)으로 바꾸어 주었으니 그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증조할아버지는 형조참의 고려절신 양중(養中)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태종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제수하면서 출사를 권했으나 응하지 않자 직접 고덕리(高德里)로 찾아와 무릎을 맞대고 거문고를 타면서 수작(酬酌)을 하였다. 태종은 공의 두 아들 우생(遇生)에게는 사온서주부(司醞署主簿)를 임명하고, 수생(遂生)에게는 군수(郡守)의 벼슬을 내리면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라에 충성할 것을 명하였다.

 

훗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공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松柏)과 같고, 높은 절의는 태산의 교악과 같도다. 저 높은 엄자릉(嚴子陵)과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길이 끼쳐주어 떨어뜨림이 없도다”라고 묘비에 새겼다.

 

할아버지는 사온서주부 우생(遇生)이다.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란 궁중에서 필요한 술과 감주를 공급하는 일을 맡은 관아로서 고려 때 제도를 본받아 태조 1 년에 설치하였다가 조선 후기에 혁파되었다.

 

소속 관원은 영(종5품) 주부(종6품) 직장(종7품) 봉사(종8품)가 각 1 명씩 있었다.

 

아버지는 평안도절도사 수철(守哲)이다. 절도사(節度使)는 조선시대 서반(西班) 무관 외관직(外官職)이다. 병마절도사는 종2품, 수군절도사는 정3품이었다. 각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였다.

 

어머니는 관찰사 이맹상(李孟常)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학문은 물론 활쏘기 · 말타기를 잘 하여 왕명으로 선전관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별시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예조정랑 · 도총부경력을 역임하고, 1477 년 경차관으로 경상우도에 나갔다가 이듬해 봉상시부정에 재수되었고, 김해부사 · 판교(判校)를 거쳐, 1492 년 장례원판결사에 올랐다. 이어 충청도 · 함경도절도사, 충청도 · 황해도 · 전라도관찰사, 부제학 · 우부승지를 지냈다. 1504 년(연산군 10) 한성부좌윤 · 우윤, 이조 · 예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형조 ·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한산군(漢山君)에 봉하여 지고 이듬해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1508년 좌참찬 재임시 재덕(才德)이 없고 늙음을 핑계로 치사(致仕)를 요청하였으나 궤장(几杖)을 하사 받고 그대로 유임되었다. 1510년 우찬성 · 좌찬성을 역임하고, 1512년 일본의 화호(和好)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1513년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진봉되고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만년에는 어려서 같이 놀던 영의정 유순(柳洵), 판서 안침(安琛) 등 여러 남학(南學)의 노신들과 구노회(九老會)를 만들어 서로 왕래하며 즐겼다.

 

1519년 벼슬을 그만둔 지 4년 만에 별세했다. 총명함이 다른 사람에 뛰어나서 국가의 전고(典故) · 문물(文物)에서 산천(山川) · 도리(道里) · 민정(民情) · 물태(物態)를 세세하게 모두 연구하여 알고 있었다. 성품이 온후하여 제족(諸族)을 은혜로 보살펴 집에 있는 자가 항상 수십 인이었다.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 구노회(九老會) : 당(唐)나라 문사들의 모임. 명칭을 인용해서 조직하였다.

 

 

2. 신도비(神道碑)

 

1520년에 건립된 이 비는 귀부이수(龜趺螭首)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수 앞면에서는 용 두 마리가 가운데의 여의주를 마주 올려다보고 있는데 운문(雲紋)에 감싸여 있고, 뒷면도 동일하며, 측면에는 용꼬리와 운문이 있다. 귀부는 거북머리가 앞을 직시하고 목의 주름이 굵게 하나가 접혀 있으며, 앞 뒤 다리는 몸통에 부조형태로 각(刻 )하여 붙였고, 꼬리도 왼쪽으로 들어 올렸다. 비의 마멸이 진행되고 있으나 판독이 가능하다. 영구 보존코자 현재는 신도비각에 옮겨 놓았다.

 

 

신도비

 

신도비각

 

묘소는 정경부인 경주이씨와 쌍분이다. 육각형 호석, 상석, 향로석, 족석, 혼유석, 계체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이 있다. 묘역과 신도비는 광주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의 특징은 호석(護石)이 6각 3단으로 조성되어 있고 묘비와 신도비는 조선 중기의 석물로 미술적 가치가 높다는 전문위원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 건립된 비좌하엽(碑座荷葉)의 묘표가 각각 1기씩 있으며 조선 중기에 제작된 정경부인 경주이씨의 묘지석 4편과 남곤(南袞)이 묘지명을 지었으며, 김노(金魯)가 백자편에 글씨를 썼다.

 

2013년 8월 6일 필자가 답사하였을 때는 극심한 폭우로 인해 정경부인의 묘소가 크게 훼손이 돼 있었다. 종손에게 빨리 복구를 부탁하였으나 문화재이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쓸 수 없다고 하였다.

 

비문탁본

 

가. 원문(原文)

胡簡公神道碑

有明朝鮮國秉忠奮義靖國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漢山君 贈諡胡簡公神道碑銘幷序

嘉善大夫工曹參判兼 同知 經筵春秋館義禁府事守弘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李荇 撰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金希壽 書

公諱蓀字子芳姓李氏廣陵人曾祖諱養中高麗刑曹左參議我朝革命 太祖 太宗累徵終不紀祖諱遇生司醞注簿贈吏曹判書考諱守哲平安道節度使贈議政府左贊成妣陽城李氏觀察使孟常之女夫人益齋李文忠公六世孫贈祖諱擔承政院右副代言祖諱暿慶尙道觀察使考諱繼藩龍驤衛攝護軍妣咸安尹氏縣監瀚之女公年少夫人二歲至是後夫人二歲卒並享壽八十二鳴呼公三十而仕奉國五十餘年不敢少懈以隮崇品夫人二十而笄治家六十餘載罔有

一愆永膺厚福人咸曰難矣哉公登己卯進士學問之餘又善弓馬 世祖命補宣傳官參成宗朝原從功臣擢庚寅文科累轉禮曹正郞都摠府經歷奉常寺副正調金海府使由承文院判校陞掌隸院判決事自是出入踐履皆一時重任其爲兵馬節度使者曰忠淸咸慶凡兩道爲觀察使者曰忠淸黃海全羅凡三道參近侍者再曰弘文館副提學承政院承旨歷諸曹者五曰戶曹參議議禮吏曹參判刑曹兵曹判書

聖上中興公方判兵曹錄勳賜秉忠奮義靖國功臣號超堦崇政封漢山君未幾拜議政府右參贊年至請老

上命賜几杖敦諭不許旣而陞左贊成貳公弘道朝夕台鉉公益懼盛滿上表乞骸骨至再三愈懇 上賜敎書慰勉留之俄進堦崇綠公猶執先志辭以疾

上不得已遆爲判中樞府事以漢山君就閑頣養者凡四年而終疾革

上命賜醫藥訃聞輟朝二日官庀喪事太常諡曰胡簡鳴呼公性稟寬厚心存敬謹其居家事親以孝處兄弟以友恩育諸族不間疎遠疾病死喪護救備至常食于家者亦不下數十人家儲屢空略不爲意喜與人論說諄諄不知倦非疾病未嘗一日處於內其居官務持大體不事細察至決大議未嘗小撓其聽訟剔繁攝要剖斷如神

吏莫容奸民無隱情其治民寬不至縱威不至荷蘇羸馭梗納之大軌故所至必有聲續盡可稱述聰明之性出於天賦一經耳目終身不忘國家典故文物以至山川道里民情物狀纖悉究到凡有疑質應苔如響無少遺失後進者倚以爲蓍蔡焉旣老與柳領相洵安判書琛及諸老之少時同遊南庠者結爲九老會每良辰佳節扶携子姪迭相往來爲娛一世稱爲美事夫人生而英肅長而溫慤父母異之曰此女不可以儷凡子廣陵之李爲世巨族節度公思惟宗祀之重爲公擇賢家婦得夫人喜曰足以付吾家事無憂矣夫人上奉舅姑芳接娣姒下無婢僕曲有禮意內外斬斬言不踰梱不以纖芥累君子公之享有多社終始以禮者亦夫人善承之也旣疾諸子請迎醫行禱夫人曰吾

年有八十榮貴亦至有何所望意不肯其亦賢矣哉公以正統己未十二月二十日生正德庚辰正月二十二日卒是年四月初四日葬夫人以正統丁巳七月初十日生正德戊寅二月十八日卒是年四月二十八日葬異墳同塋乃廣州治東無甲山艮坐坤向之原也生四男三女長粹彦登第官至司憲府執義人以公輔期之未四十而歿次純彦內資寺副正次溫彦有才名未第而夭次誠彦登第參靖國勳以水原府使坐封()罷女長適成允祖登第終漢城府郵尹次適權肩終司憲府監察次適申儼登第終軍資監正側室子方山忠佐衛司果執義有子曰經掌隸院司議曰緯司憲府監察副正有子曰綱陰竹縣監曰紀登武科鐵山郡守內外孫總七十八人鳴呼積善之報寧有艾邪銘曰

執倍其根 面枝不繁 欲流之長 在濬厥源 廣陵之先 是謂德門 參議高蹈

匪時之屯 不食其報 以遺後昆 其人伊何 爲世達尊 其配伊誰 益齋之孫

二大相偶 犀帶魚軒 衆人所矜 公戰以兢 保有令聞 禮備數登 我公之德

夫人是承 我公之福 夫人與膺 曰子曰孫 繼繼繩繩 刻石墓左 來者有徵

 

나. 역문(譯文)

호간공 이손비명

유명조선국병충분의정국공신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한산군증시호간공신도비명병서

가선대부공조참판겸동지경연춘추관의금부사수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 이행은 글을 짓고

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김희수가 글씨를 쓰다.

 

공의 휘는 손(孫)이요 자는 자방(子芳)이며 성은 이씨이고 광릉인이다.

증조의 휘는 양중(養中)이니 고려에서 형조 좌참의이고, 조선조의 혁명이 있은 후 태조와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부의 휘는 우생(遇生)이니, 사온주부이며 이조판서의 증직을 받았고, 선고의 휘는 수철(守哲)이니, 평안도절도사로서 의정부좌찬성의 증직을 받았다. 모친은 양성이씨이니 관찰사 맹상(孟常)의 딸이다. 부인은 익재(益齋) 이문충공의 6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담(儋)이며 승정원 우부대언이며, 조부의 휘는 희(暿)이니 경상도관찰사요. 부친은 계번(繼藩)이니 용양위섭호군이다.

 

모친은 함안윤씨이니 현감 한(澣)의 따님이다. 공의 나이가 부인보다 2세가 더 젊다. 부인이 작고한 후 2년만에 공께서 돌아가셨는데 다 같이 수를 82세를 누렸다.

 

아! 공이 30에 벼슬길에 올라 나라를 받들어 일 한지 50여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아 높은 품계까지 올랐다. 부인은 20세에 시집와서 집안을 다스린지 60여년에 한 가지 허물도 없이 큰 복을 받았으니 사람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공은 기묘년(1459)에 진사가 되었고 학문하는 여가를 틈타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여 세조가 명하여 선전관에 보하였다.

 

성종 때에 원종공신에 뽑혔고, 경진년(1460)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옮겨 다니며 예조좌랑, 도총부 경력, 봉상시 부정으로 또 김해부사를 거쳐 승문원 판교로써 장례원 판결사로 승진하고, 이로부터 출입하고 실천하는 것이 모두 한때의 중대한 책임이었다. 병마절도사가 된 것은 충청 함경의 양도였고, 관찰사가 되었던 것은 충청 황해 전라의 3도였으며, 근시(近侍)에 참여한 일이 두 번이니 홍문관부제학과 승정원승지다. 여러 조(曹)를 거친 것이 5조인데 호조의 참의, 예조와 이조의 참판, 형조와 병조의 판서이다. 성상이 중흥하니 공께서 마침 병조판서로 있었다. 공훈을 기록하여 병충분전정국공신의 호를 내리고 숭정대부로 위계가 뛰어올라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얼마 안 있어 의정부 우참찬에 제배하였다.

 

노경에 이르러 쉬기를 청함에 왕이 명하여 궤장을 하사하고 착실히 타일러서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 후에 좌찬성에 승진시켜 공의 넓은 도를 표하였다. 조석으로 3공의 자리에 같이하게 하였다. 공이 너무 성하고 가득한 것을 두려워하여 표를 올려 하직하고, 평민 되기를 재삼 간절히 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위로하고 그대로 있기를 권하였다. 얼마 있다가 뜻을 굽히지 않고 병으로 사양하니 왕이 어찌 할 수 없어 자리를 바꾸어 판중추부사를 삼고 한산군(漢山君)으로 한가로이 몸을 보양토록 한지 4년 만에 생을 마쳤다. 병환이 중했을 때 왕이 의약을 내리도록 명하였고, 부음을 듣고 조회를 2일간 거두었다. 관에서 장사를 도와주도록 하고 봉상시에서 시호를 호간(胡簡)으로 내렸다.

 

슬프도다. 공의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며, 마음가짐이 공경하고 근엄하였다.

그가 집에 있을 때면 어버이 섬기기에 효도로 하고, 형제간에 우애로 처하며, 은혜로 모든 일가간에 화목하게 지냈다. 조금도 소원함이 없었고, 병들고 죽고 상을 당했을 때 구원해주는 것이 지극하였다. 평상시에 집에서 먹고 지내는 사람은 또한 수십 인이어서 양식이 여러 번 떨어져도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과 의논하기를 기뻐하였는데 말씀이 간결하여 권태를 느끼지 않게 하였다. 질병이 아니면 하루라도 내실에 있지 않았고, 관무(官務)를 볼 때에는 대체를 가지고 일을 처리하였다.

 

잡다한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큰 의론을 결정하기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송사(訟事)를 들을 때면 번거로운 것을 잘라 없애고, 중요한 것만 뽑아서 갈라서 판단하기를 신명하게 하니, 이속(吏屬)들은 간사함을 용납하지 못하고 백성들은 원정(怨情)을 품음이 없었다. 치민(治民)하는 데는 관대하면서도 방종하지 않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가혹하지 않았다. 약한 것을 소생시키고 막힌 것을 풀어서 큰 궤도로 돌려놓았으므로 가는 곳 마다 반드시 칭찬받는 치적을 올려 모두 칭송하였다.

 

총명한 성품은 천부(天賦)에서 나온 것이므로 한번만 이목을 거친 것이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국가의 역사적인 문화 물질로부터 산천과 도리(道里)며, 민정과 물상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모두 연구하여 무릇 질의를 하는 일이 있으면 응답하기를 즉각 산울임같이 하여 조금도 실수가 없었다. 후진들이 모르는 것을 점쳐서 알아맞히듯 물어 보았다. 늙은 후에 영상 유순(柳洵)과 판서 안침(安琛)과 여러 노정치가로 구노회(九老會)를 만들어 매 양간과 가절에 자질들의 손을 잡고 유쾌하게 서로 왕래하며 즐겨 놀고 지내니 일세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부인께서는 탄생 할 때부터 영특하고 엄숙하게 자라나서 온순하고 아름다웠다. 부모가 신기하게 생각하며 말하기를 “이 여아는 보통 사나이와는 짝지을 수 없다”고 하였다. 광릉의 이씨가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거족으로서 절도사공(節度使公)이 종사(宗祀)의 중함을 생각하고, 공을 위하여 어진 맏며느리 감을 고르더니 부인을 만나서 말하기를 “족히 우리 집안일을 맡겨서 근심할 바 없을 것이다” 하였다. 부인은 위로 구고(舅姑)를 받들고 곁으로는 시누이와 동서를 접하며, 아래로는 비복(婢僕)을 어루만지는데 정의를 다하였다. 안팎으로 깔금하며 말이 안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잡다한 일로 부군을 괴롭히지 않으니, 공께서 많은 복을 누리며 시작부터 끝까지 예로써 살아간 것이 또한 부인께서 뜻을 잘 받들어 드린 데서 온 것이다.

 

병환이 나서 모든 자녀들이 의원을 청하고, 하늘에 빌 것을 행하고자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내 나이 80 이 넘었고 귀하고 영화롭게 살아왔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 어지심이 이와 같았다.

 

공은 정통 기미년(1439) 12월 20일에 탄생하여 정덕 경진년(1520) 정월 22일에 졸하였다. 이해 4월 초 4일에 장사지내고, 부인은 정통 정사년(1437) 7월 10일에 탄생하여 정덕 무인년(1518) 2월 18일에 졸하였다. 이해 4월 28일에 장사지내어 이분동영(二墳同塋)인바 광주 동쪽 무갑산 간좌곤향의 언덕이다.

 

공은 4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수언(守彦)은 등제하여 벼슬이 사헌부 집의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공보(公輔)로 기대하였으나 40이 못되어 일찍 작고하였다. 차남 순언(純彦)은 내자시 부정이요, 다음은 온언(溫彦)인데 재명이 있었으나 과거도 못보고 일찍 세상을 떴다. 다음은 성언(誠彦)인데 등제하여 정국공신에 참여하였으며 수원부사가 되었다. 장녀는 성윤조(成允祖)에게 출가하였으니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부우윤을 하였다.

 

다음은 권견(權肩)에게 출가하니 사헌부감찰이요, 다음은 신엄(申儼)에게 출가하니 과거에 급제하여 군자감이다. 측실의 아들 방산(方山)은 충좌위사과요, 집의의 아들은 경(經)이니 장례원사의요, 다음 위(緯)는 사헌부감찰이요, 부정의 아들은 강(綱)이니 음죽현감이요, 다음은 기(紀)이니 무과로 철산군수요, 내외손이 78인이다.

 

아! 적선의 보답이 어지 아름답지 않으랴. 명(銘)에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 뿌리 북돋우면 그 가지 번성하지 않으랴

흐르는 물 길고 길게 하려면 그 근원이 깨끗해야 하느니

광릉땅에 자리 잡은 그 선조 이아니 덕문인가

참의공께서 절의 지켜 은둔함은 그 시대의 돈색(頓塞)함이었다

그 보답 받지 못하여 후손에게 내려주었네

그 사람 어찌 되었던가 수(壽)와 덕과 벼슬 높았네

그 부인 누구신가 익재(益齋)선생 후손이라네

훌륭하신 두 분이 서로 만나 벼슬 높아 영광 누리셨네

모든 사람 자랑삼아 좋아하나 공께서는 조심하고 경계하였네

아름다운 명성을 보존하고 예우 받고 자주 등용되었고

공의 높으신 그 덕은 부인께서 이것을 이어받고

공의 크고 큰 그 복은 부인께서 다같이 받으셨네

훌륭한 그 아들 그 손자여! 이어서 내리고 또 이어졌네

비석에 글로 새겨 세워놓고 오는 사람 다 같이 고증하리라.

정덕(正德) 15년 경진(1520) 5월 일에 세우다.

 

 

3. 광주이씨 대종회에서 만든 행장(行狀)

 

한산재 전경

 

자는 자방이며 세종 기미 1439 년 12 월 20 일생으로 성종 경인년에 문과에 급제하시어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고 정국공신으로 한산부원군에 봉해지셨으며 시호가 호간(胡簡)이라 내려졌다.

 

공은 총명함이 하늘이 낸듯하고 국사의 살림에 있어서 신과 같았으며 전물과 산천도리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연구하시어 일세가 다 점을 지듯이 잘 안다고 하였다.

 

중종 경신(1520)년 정월 12일에 졸하시니 향년 82 세였고 묘는 선고 묘하 간좌이며 신도비가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경주이씨이시고 부는 부장계번으로 익재 문충공 제현의 6 세손이며 중종 무인년 2월 28일에 졸하시고 묘는 쌍분이며 슬하에는 장남 수언, 차남 순언, 삼남 온언, 4남 성언을 두시었다.

 

2009년 3월에 공의 묘소를 사초봉사 하였으며 무갑산 선영묘하에 한산각(漢山閣)을 새로이 건립하고 신도비를 모셨다.

 

2013년 4월 20일 한산재(漢山齋)에서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지정 고유제 및 추모제를 봉행했다.

 

한산재

 

※참고문헌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해동명신록』 『국조인물고』 『국조문과방목』 『용재집』 『남한지』 『광주금석문대관』 『廣州市史』

 

 

호간공(胡簡公) 이손(李蓀) 선생 추모고유제

 

일  시 : 2013 년 10 월 19 일(土)

장  소 :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신월리 무갑산

낭송참석 : 강동문인회회원 및 廣州李氏大宗會

후  원 : 강동구. 광주이씨대종회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26 사진/힘동진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32 사진/힘동진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33 사진/힘동진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43 사진/힘동진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46 사진/힘동진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47 사진/힘동진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59 사진/힘동진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62 사진/힘동진

 

(14)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67 사진/힘동진

 

(15)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74 사진/힘동진

 

(16)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075 사진/힘동진

 

(17)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162 사진/힘동진

 

(18) 2013.10.19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고유제 166 사진/힘동진

 

 

(사무국)

호간공 이손선생 추모시문 낭송회 제 107 회

 

일 시 : 2013 년 10 월 19 일(토)

장 소 :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무갑산 한산재.

후 원 : 광주이씨대종회

참 석 : 김태경. 김정국.김아랑. 김미옥. 남민옥. 남시호. 남지연. 노태민. 배정자. 박천순. 문성환. 성낙수. 임채수. 이의웅, 윤영남. 이용수. 윤철환. 이인환. 임기환. 정영기. 전재동. 함동진. 김명준. 신길우. 조득승. 정근식. 황영목. 광주이씨: 이종덕. 이만술. 이백 . 이만술. 이학술. 이재순. 이점성. 이무웅. 이태술. 이용완. 이석술. 이창희. 이호순. 이병훈, 이재순. 이강순. 이종길. 이종운. 이희춘. 이근호. 이병옥. 이병욱. 이재술. 이종연. 이정수. 이인술. 이만희. 이동희, 이원희. 이병익. 이종식. 이봉삼.(59명)

 

광주이씨 대종회 도유사 이종덕회장 인사말씀

석탄공 할아버지에 이어 호간공 할아버지까지 강동문인회 의 추모 시문과 제례와 낭송회를 열어주시어 각별히 크신 정성과 은혜에 깊은 감사드린다. 우리선영을 찾아오신 문인님들에게작으나마 간단한 선물과 한산주와 곁드린 식사를 마련하여 호간공 할아버님의 은덕을 베푸는 빛나는 자리에 참석해 주신 문인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정영기 회장 인사말씀

날씨도 청명하고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을 맞아 많은 문인들이 참석하여 우리고장의 빛나는 인물들을 조명하고 새로운 역사의식를 탐구하는 좋은 기회가 되어 마음 기쁘기 한량 없다고 하셨고 다가오는 10월 31일(목)오후 7시 30분 강동아트센타 대극장에서 "가을하늘빛 담은 시와 몸짓"공연에 친지 및 가족과 함께 많이 참석 즐거운 가을을 만끽 했으면 좋겠다는 인사말씀을 하셨습니다.

 

※ 광주이씨 대종회측에서 타올.떡.한산주.푸짐한 소머리고기 와 식사를 제공

 

2013.10.19 호간공이손선생 추모행사 089 사진/함동진

 

정영기회장님, 임기환사무국장님 행사추진과 진행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