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강

이인손

이극배

이극감

이극증

이극

이 손

이성언

이 점

이연경

이준경

이윤경

이덕형

이광악

이시무

이정립

 

高麗 太祖 王建에 불복하여 회안 호장(淮安 戶長)으로 강계된  휘 漢希의 후손들은 廣州官衙에서 수백년 衙前과 驛吏로 살아오면서도 李氏 姓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있고 品行이 바르고 德性이 있다고 주위에 알려졌고,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廣州의 鄕吏로 移屬시켜서 科擧에 나갈 수 있었으며 高麗 後期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들 중에 고려 고종(1213~1259년) 때 광릉삼현(廣陵三賢)으로 명성을 날렸던 광릉삼익(廣陵三益) 의 諱 益庇(尙書佐僕射), 益俊(閤門祗候), 益康(令同正 戶長) 삼형제 중 益庇와 益康의 후손들이 현달이 두드러졌으며, 諱 益庇의 4대손인 遁村公 集(判典校寺事)과 諱 益康의 5대손인 石灘公 養中(刑曹參議)과 巖灘公 養蒙(版圖 判書) 형제 등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특히 석탄공과 암탄공 형제는 麗末 高麗 조정의 형조참의와 판도판서의 고위직에 올라 광주이씨의 중흥을 꾀하였으나 李太祖의 朝鮮 建國으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두문동72현 되셨으며 후에 남한산하에 은거하시어 高麗末의 대표적인 忠節臣과 忠節家門이 되었다.

 

諱 集의 둔촌공파 (遁村公派)는 조선 중기의 광주이씨 중흥의 주류를 이루면서 조선조 최고의 名門家로서 당대의 명성을 날렸다.

둔촌(遁村)의 세아들이 형조참의 좌참찬 사간을 지냈으며. 손자인 仁孫 (忠僖公)의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卿相의 지위에 올라 名門의 지반을 다졌는데 장남 극배(克培)는 성종(成宗)때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무렵 조정의 어전회의에는 광주이씨 극(克)자 항렬 8명이 영의정에서부터 내리 참석하고 있었다고 해서 생긴 말이 '팔극조정(八克朝廷)'이란 표현이 회자 되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선조 때에 가문을 빛낸 광주이씨 가문의 큰별이다.  32살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이 된 그는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에 올라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외교수완으로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수복에 수훈을 세웠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영의정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했다가 삭직되고 양근(陽根)으로 내려가 53세로 생을 마쳤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혼조삼리(昏朝三李)>라 하여 이항복 · 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임진왜란에 짓밟힌 사직을 지탱한 명신이었다.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96명, 무과 급제자 245명으로,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다.

 

조선조에서 광주이씨(廣州李氏) 중 시호를 받은 분은 16분으로 다음과 같다.

 

 

 

이지강

  조선|시호 문숙|대사헌

 

1363(공민왕 12)∼1427(세종 9). 조선 전기의 문신.

호조판서|예조판서|대사헌|의정부참찬.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잠(仲潛). 아버지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한 집(集)이다.

 

1382년(우왕 8) 과거에 급제, 중서문하성의 녹사(錄事)를 거쳐, 1392년(태조 1) 기거주(起居注)로서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 특히, 이방원(李芳遠)의 측근으로서 1393년 정도전(鄭道傳) 일파에 의해 탄핵,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뒤 이방원이 즉위해 정권을 잡자 사헌부장령으로서 풍기단속과 공신세력 제거에 앞장섰다.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직제학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전토 40결을 하사받았다. 이어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지내면서 창업 초기의 궁궐 수축에 힘썼으며, 외직으로 수원부사가 되어 민정을 직접 다스렸다.

 

1411년 예조우참의로서 충청도 · 전라도 경차관에 임명되어 민정을 순찰, 탐학을 저지른 전라도수군도절제사 홍유룡(洪有龍), 임실감무 최참(崔漸), 당진감무 임을생(任乙生)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그 뒤 이조참의 · 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416년 한성부윤이 되어 도성의 살림을 주관하였다. 이듬 해 경상도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호조참판 · 형조참판을 지냈다.

 

1419년 세종이 즉위하자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평안도도관찰사 ·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 체계를 바로 하는 데 힘썼다.

 

1420년(세종 2) 호조판서, 이어 예조판서 · 대사헌 · 의정부참찬을 지내고 1425년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어 군권을 총지휘하다가 곧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성품이 단정하고 검소했으며, 특히 재정 부서에 오래 근무했음에도 결코 축재에 관심이 없었다 한다. 문장에 능했고, 행정 업무에 있어 결단력이 있었다. 후사가 없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인손

  조선|시호 충희|우의정

 

1395(태조 4)∼1463(세조 9). 조선 전기의 문신.

형조좌랑|예조좌랑|경상도관찰사|우의정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윤(仲胤), 호는 풍애(楓厓). 당(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集)이고, 아버지는 참의 지직(之直)이며, 어머니는 이원보(李元普)의 딸이다.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7년(태종 17)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 검열에 발탁되었다. 그 뒤 사헌부감찰을 거쳐 1429년(세종 1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형조좌랑 · 예조좌랑 · 집의 · 판군자감사 · 예조참의 · 경상도관찰사 · 형조참의 · 대사헌 ·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는 한성부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형조참판을 거쳐, 1454년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잡게 되자 호조판서에 승진되고, 1455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봉하여졌다. 이어서 판중추부사로서 판호조사를 겸임하고 우찬성을 거쳐 1459년(세조 5) 우의정에 오른 뒤 곧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이극배

  조선|시호 익평|영의정

 

1422(세종 4)∼1495(연산군 1). 조선 전기의 문신.

승문원부정자|검찰관|정랑병조참판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영중추부사우의정영의정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겸보(謙甫)이다. 호는 우봉(牛峰)이다. 집(集)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지직(之直)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인손(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그 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문원부정자로 보임되었다. 이어 감찰이 되었으며, 검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정언 · 지제교가 되었다. 얼마 뒤에 지난번 명나라에 갔을 때 검찰직을 잘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어 병조 겸 좌랑이 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는 데 공이 인정되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457년(세조 3)에는 예조참의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되어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 병조참판과 예조참판 겸 집현전제학을 거쳤다. 1459년에는 북변의 야인 정벌 때 신숙주(申叔舟)의 종사로 출전했고, 돌아와서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462년 이래 호조 · 공조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평안도절도사가 되어 변방의 어수선한 인심을 잘 무마했다.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품계가 올라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예종 때는 우참찬이 되었다.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479년에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올라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481년부터 2년 동안 대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사(賑恤使)로 활약하고, 겸판호조사(兼判戶曹事)가 되었다. 1485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1493년에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을 구실로 사양했다. 다시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기국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뜻과 생각이 견고했다. 경학으로 근본을 삼았고 행정 재능도 겸비하였다. 오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사사로이 손님을 맞지 않았으며, 가무(歌舞)는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대체적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이극감

  조선|시호 문경|형조판서

 

1427(세종 9)∼1465(세조 11). 조선 전기의 문신.

이조참의동부승지형조판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덕여(德輿). 집(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직(之直)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인손(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경사(經史)를 읽으면 대의를 통하였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집현전에 발탁되었고, 1447년에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에 임명되었으며, 1448년에는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이 새로 설치되자 우찬독(右贊讀)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하자 경연사경(經筵司經)을 지내고, 이듬해 대제학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하였다.

 

1455년(세조 1)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아 즉위하자 검상이 되었고, 즉위에 즈음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왕세자가 책봉되었을 때 보도(輔導)의 책임을 부여받았다. 1458년에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460년 북정(北征) 때에는 기무를 관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수찬하였으며, 『치평요람(治平要覽)』 ·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을 교정하여 간행하였고, 1461년에는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찬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이극증

  조선|시호 공장|좌참찬

 

431(세종 13)∼1494(성종 25). 조선 전기의 문신.

전라도관찰사우참찬병조판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위(景祁). 아버지는 우의정 인손(仁孫)이다.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문음(門蔭)으로 종묘녹사(宗廟錄事)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군기시직장이 되고 우정자를 역임하였다. 그 뒤 이조좌랑에 이를 때가지 항상 서연(書筵)을 겸하였다.

 

1461년 정랑, 1463년 성균관직강 겸 의정부검상을 거쳐 사인을 역임하였다. 1467년 정략장군부호군(定略將軍副護軍)에 임명된 뒤 곧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1469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 해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국가 경비의 식례(式例)인 『식례횡간(式例橫看)』을 찬정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를 받았고, 같은 해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품계가 올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1477년 외직인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 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참찬을 지냈다. 1479년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가 되고, 이듬 해 형조판서를 거쳐 1481년 좌참찬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84년에는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로서 문묘를 수축하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넓혀 위판제도(位版制度)를 일신하였다.

 

또, 향관(享官 : 祭官)의 재숙소(齋宿所)를 정록청(正錄廳 : 성균관의 관원이 時政에 대해 적어 보관하던 곳)의 북쪽에 두었고, 관사의 무너진 곳을 고치는 등 학궁(學宮)에 공이 컸고 14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다. 또한, 관직에 있을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히 공사를 처리했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공장(恭長)이다.

 

 

 

이극돈

  조선|시호 익평|좌찬성

 

1435년(세종 17)∼1503(연산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형조좌랑사헌부집의예조참의예조참판병조참판사헌부대사헌전라도진휼사병조판서이조판서병조판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집(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직(之直)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인손(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1457년(세조 3)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정과로 급제해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에 임명되고 1459년(세조 5) 형조좌랑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통례문판관에 이어 성균관직강 · 예문관응교 · 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지내고, 1467년(세조 13) 호군(護軍)으로 부산포에서 유구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집의로 임명되어 ≪경국대전 經國大典≫ 형전(刑典) · 호전(戶典) 중에서 잘못된 곳을 지적하고, 불법한 홍윤성(洪潤成)의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기도 하였다. 1468년(세조 14)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일본통신사로 파견되어 예조참의로 승진하였다. 1469년(예종 1) 우윤이 되고, 경회루에서 행한 부시(賦詩)에서 1등을 하였다.

 

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문정보감 武定寶鑑≫을 편찬하고, 이어 수사헌부대사헌(守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다시 ≪경국대전 經國大典≫을 교정하고,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승진되었다가 이듬 해 좌리공신(佐里功臣) 4등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동지관사(同知館事)로서 ≪세조실록 世祖實錄≫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다.

 

1472년광원군(廣原君) 겸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듬 해 호조참판, 1474년(성종 5)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또 예조참판에 임명되어 흥천사(興天寺) 기우제(祈雨祭)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476년 예조참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중궁 책봉에 대한 주본(奏本)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8년 병조참판, 이듬 해 예조참판(禮曺參判),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겸 영흥부윤(永興府尹)이 되었다. 1481년 이조참판(吏曺參判) ·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고, 또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강목신증 綱目新增≫을 찬하였다.

 

 

 

이 손

  조선|시호 호간|좌찬성, 정국공신

 

1439(세종 21)∼1520(중종15). 조선 전 · 중기의 문신.  

한성부좌윤예조참판병조판서판중추부사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방(子芳). 형조좌참의 양중(養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생(遇生)이고, 아버지는 평안도절도사 수철(守哲)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이맹상(李孟常)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학문은 물론 활쏘기 · 말타기를 잘 하여 왕명으로 선전관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 ·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을 역임하고, 김해부사 · 판교(判校)를 거쳤다.

 

1492년 장례원판결사, 이어 충청도 · 함경도절도사, 충청도 · 황해도 · 전라도관찰사, 부제학 · 우부승지를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한성부좌윤 · 우윤, 이조 · 예조참판을 거쳐, 형조 ·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 3등으로 한산군(漢山君)에 봉하여지고,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1508년 좌참찬 재임시 재덕(才德)이 없고 늙음을 핑계로 치사(致仕)를 요청하였으나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 뒤 우찬성 · 좌찬성을 역임하고, 1512년 일본의 화호(和好)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1513년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진봉되고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만년에는 영의정 유순(柳洵), 판서 안침(安琛) 등 남학(南學)의 친우들과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서로 왕래하며 즐겼다.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이성언

  조선|시호 양평|병마절도사, 정국공신

 

?∼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김해부사|전라좌도수군절도사|한성부좌윤

 

중종반정 후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봉되었고, 1509년(중종 4)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510년에는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511년에 장령을 지낸 뒤 1512년에는 무재(武才)가 있다고 해서 김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노부모 봉양을 이유로 수원부사와 서로 바꾸었다.

 

1517년에는 수원부사로 있으면서 이행(李荇)을 변론한 상서가 광패(狂悖)한 표현이 많다고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22년에는 당시에 통훈대부 검상이었으나, 武才를 지닌 문신으로 여겨져 당상관으로 가자된 뒤 만포첨사에 임명되었다. 1525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528년에는 다시 武才가 있다는 이유로 가자되면서 함경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 황주목사를 지내고 1531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1532년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533년에는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 1534년에 진위진향사(陳慰進香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이 점

  조선|시호 문호|형조판서

 

1446(세종 28)∼1522(중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성균관사예|사간원사간|경기도관찰사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숭보(崇甫). 밀(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智)이고, 아버지는 찰방 관의(寬義)이며, 어머니는 강순경(姜舜卿)의 딸이다.

 

1477년(성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사예 · 사간원사간 · 성균관사성을 거쳐, 1499년(연산군 5) 사헌부집의 · 사도시정(司䆃寺正)을 역임하였다. 1500년 초무부사(招撫副使)로 해랑도(海浪島)의 유민을 수색한 공으로 봉상시정(奉常寺正)이 되고, 이듬해 홍문관부제학 · 동부승지 · 좌승지 · 도승지 등에 이르렀다.

 

1503년 형조참판 ·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재직중 갑자사화에 연루,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508년 형조판서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듬해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를 지내고, 1512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515년 동지성균관사 · 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고, 1517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몸가짐이 바르고 곧아 가는 곳마다 청백(淸白)으로 일컬어졌으며, 성명(性命)의 오묘한 이치를 통달하고 천지 · 일월 · 성신의 도수에 환하였다. 시호는 문호(文胡)이다.

 

 

 

이연경

  조선|시호 정효|교리

 

1484(성종 15)∼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선릉참봉|공조좌랑|홍문관교리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 · 용탄자(龍灘子).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도사 수원(守元)이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南陽房氏)로 사용(司勇) 의문(毅文)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섬으로 귀양갔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학문에만 전념할 뿐 과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다. 1518년 풀려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라 해 억울하게 죽은 인물의 자손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 ·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 · 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 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해 사헌부지평을 거쳐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다. 교리로서 경연에 참석했을 때 재상의 선출이 논의되자 조광조(趙光祖)를 천거하였다. 조광조 일파의 힘으로 급제 전에 이미 청요직에 진출하는 혜택을 입었다.

 

이와 같은 평소의 조광조와의 교유로 인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축출될 뻔했으나, 중종이 어필로 찬인록(竄人錄 : 귀양 간 인물들을 적은 기록)에서 이름을 지워 귀양을 면했다.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공주에 물러가 살면서,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며 낚시를 즐겼다 한다.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었을 때도 나가지 않았다.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었다 한다. 학문은 세속에서 벗어나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시종 불변하였다.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문하가 되었는데, 노수신(盧守愼) · 강유선(康維善) · 심건(沈鍵)은 그의 문하이자 사위들이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광안군(廣安君)으로 봉해졌으며, 팔봉서원(八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이준경

  조선|시호 충정|영의정

 

1499(연산군 5)∼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홍문관부수찬|사헌부장령|대사헌|우의정|영의정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 남당(南堂), 홍련거사(紅蓮居士), 연방노인(蓮坊老人, 서울 출신. 극감(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그 해 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 · 사헌부장령 ·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 · 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 · 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 · 한성부판윤 · 대사헌을 역임했으나 1550년 정적이던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 : 불러서 타이름)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했으며,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하성군 균(河城君鈞 :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 십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 · 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 · 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차(遺箚 : 유훈으로 남기는 차자)를 올려 이이 · 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 · ≪조선풍속 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이윤경

  조선|시호 정헌|병조판서

 

1498(연산군 4)∼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예문관검열|부수찬|교리|사헌부지평|의주부윤|성균관대사성|전주부윤|도승지|병조판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길(重吉), 호는 숭덕재(崇德齋). 극감(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수찬(修撰) 수정(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준경(浚慶)의 형이다. 1504년 갑자사화에 아버지 수정이 화를 입자 온 가족이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유배 중에 어머니로부터 ≪효경≫ · ≪대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지략이 많고 학문이 깊어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4년(중종 29)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으로 옮겨 부수찬 · 수찬 · 부교리 · 교리를 역임하고, 사간원 · 사헌부로 옮겨 정언 · 사간 · 지평을 지냈다. 1543년 의주부윤이 되어 국방을 강화했고, 인종의 즉위와 더불어 다시 내직으로 옮겨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賢良科)의 재실시를 청하였다.

 

이어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대윤을 제거하는 데에 가담,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으며,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기(李芑)의 품성이 거칠고 위험함을 논박하다가 쫓겨나 성주목사가 되어 고을을 잘 다스리니, 성주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감복해 <운간이사군 雲間李使君>이라는 노래로 치하했다 한다.

 

이 때 아들 중열(中悅)이 이덕응사건(李德應事件)에 몰려 사사(賜死)되자, 이로 인해 1550년(명종 5) 공훈과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553년 용서되어 다시 승지를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주부윤으로서 영암성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그 공으로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그 뒤 경기도관찰사 · 함경도관찰사 · 도승지를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 때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노략질하자 국왕이 “평안도가 더욱 중하니, 반드시 최적임자를 선택해야겠다.”고 하여 수망(首望)으로 천거되었다.

 

오래 앓던 끝이라 몸이 허약했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평안도관찰사에 부임해 국방을 강화하다가 마침내 공관(公館)에서 병사하였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이덕형

  조선|시호 문익|영의정

 

1561(명종 16)∼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부수찬부교리이조좌랑동부승지대사성예조참판대사헌병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영의정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 쌍송(雙松) · 포옹산인(抱雍散人). 부사과(副司果) 수충(守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찬성 진경(振慶)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민성(民聖)이며, 어머니는 현량 유예선(柳禮善)의 딸이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해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 한다.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받았다. 1582년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만나보고 싶어했으나 사적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귀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 진작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하였다. 이듬 해서총대(瑞葱臺)의 응제(應製)에서 장원을 했고, 이 외의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 뒤 부수찬 · 정언 · 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 · 우부승지 · 부제학 · 대사간 · 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 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에서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당도했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했다 한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했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파병을 성취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했으며, 이어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란 중 줄곧 같이 행동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경기 · 황해 · 평안 · 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慰撫)하였다. 그 해 우의정에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

 

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 · 전라 · 충청 · 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정벌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했으나 본인의 사양과 시기하는 자들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그를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이광악

  조선|시호 충장|함경도 병마절도사

 

1557(명종 12)∼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무신.  

곤양군수(昆陽郡守)전라도병마절도사훈련원도정경기방어사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아버지는 군수 호약(好約)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으로 왜병이 영남일대에 쳐들어오자 선봉으로 장병을 격려하여 대비하였다.

 

그 뒤 적이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여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고립되고 대세가 위급해지자, 당시 거창에 있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으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성안에 들어가 김시민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를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적을 격퇴시켰다. 1594년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부장으로 함께 동래에 갔으나 적이 나오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이후 100여 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 우군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특히 활을 잘 쏘아 화살 하나에 반드시 3, 4명을 죽였다고 한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 · 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명과 우마 60여필을 탈환하였다.

 

그 뒤 훈련원도정을 거쳐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160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이시무

  조선|시호 충민|판결사

 

생졸년 1532~1592.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군우(君遇).이극배(李克培)의 현손이며 찰방 이건(李乾)의 아들이다. 선조 병자년 문과 등과했다. 판결사에 이르렀고 임진란에 죽었다. 임진왜란 당시 노환으로 御駕를 護宗치 못해 子 廷立을 보내고 매일 조복을 입고 高德山에 올라 몽진하는 임금께 경배를 올렸다. 이 때 조복 차림에 경배하는 공의 모습이 왜군에 발견되어 고덕산에서 시해 당하고 시해를 지켜본 가족들이 왜군의 능욕을 피하고자 한강물에 뛰어들어 일가문 6명이 동시에 상을 당하였다. 후에 나라에서 이들에게 충신 효자 효부 열녀의 旌門 과 충민의 시호를 내렸다.

 

 

 

이정립

  조선|시호 문희|대사성

 

1556(명종 11)∼1595(선조 28). 조선 중기의 문신.

형조참의|좌승지|예조참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좌랑 수겸(守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찰방 이건(以乾)이고, 아버지는 판결사 시무(時茂)이며, 어머니는 종실(宗室) 의원정(義原正) 억(億)의 딸이다. 최립(崔岦) · 이이(李珥) ·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76년 사마시에 합격, 1580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582년 수찬 때, 대제학 이이에게 추천되어 이덕형(李德馨) ·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시강해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 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조좌랑 · 정언을 지냈다. 이듬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하였다.

 

이조좌랑 때 호남어사가 되어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진구하였다. 그 뒤 형조참의 · 좌승지 등을 거쳐,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장령 ·  집의 ·  응교 ·  직제학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참의로 왕을 호종하였다.

 

왕의 행차가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와 사직의 위판(位版 : 신위 또는 위패)이 지금 개성에 남아 있다고 그가 아뢰니 선조가 크게 놀라면서 즉시 모셔 오라 하였다. 그는 급히 개성으로 달려가, 사람들이 모두 “이미 적장이 와 있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말렸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성에 들어가 종묘사직의 위판을 평양으로 모셔갔다.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1593년 부친상을 당해 한 때 관직을 떠났다. 1594년에 한성부좌윤 · 황해도관찰사를 역임,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