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州李氏는 현재 통합된 大宗會가 구성되지 않아 율정공파, 둔촌공파, 십운과공파, 석탄공파, 암탄공파의 5개 지파가 각각 별개의 지파대종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직계와 방계지파를 구분하기는 곤란하지만 광릉삼익의 휘 익강을 기준하여 석탄공과 암탄공파를 직계지파로 보고, 휘 익비의 율정공파, 둔촌공파, 십운과공파를 방계지파로 구분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石灘公派는 고려 23대 고종((1213~1259년) 때 廣陵三賢으로 칭송받던 廣陵三益 중 諱 익강(益康, 令同正, 戶長)을 중시조로 모시고 5대손 石灘公 養中(고려 형조참의)의 호를 따라 대종회를 구성한 廣州李氏의 支派입니다. 석탄공과 암탄공은 형제지간으로 祖考는 高麗文科 軍簿佐郞을 지내신 諱 全斯 이시고, 考는 高麗文科 가선대부 順天府使를 지내신 諱 方貴 이시며, 석탄공은 두문동 72현으로 고려말의 대표적인 수절신(守節臣) 家門입니다.

 

 

  석탄공(石灘公) 묘비문

 

中始祖 石灘公 諱 養中 影幀   

 

고려조 때 通政大夫 刑曹左參議 李公의 諱는 양중(養中)이다. 이태조 혁명 당시 신하되기를 거절하고 광주 남한산하에 은퇴하여 부르는 명에 응하지 않고 귀향을 갈지라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다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평소 때의 우의로 특별히 가선대부 한성판윤직을 주어도 받지 않음으로 태종이 오히려 광주에 가서 옛 정을 베풀거늘 公이 평복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배알하고 술과 안주를 드리니 태종이 기꺼이 놀다가 환궁할 뿐이요. 마침내 그 굳은 의지는 돌이키지 못하고 다만 석탄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관작을 내려 장려하고 석탄에게는 궁중 선물과 안부를 자주하나 석탄은 다만 시를 올려 사례하니 무릇 석탄의 굳은 지조는 옛날 백이숙제 뜻으로 엄자룡의 자취를 따르니 백세하에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고 태종의 융숭한 은혜 또한 옛날 광무황제에 지지 않으니 그 세수에 관계됨이 심히 중한지라 아니 태사씨가 사책에 자세히 적어 자능과 더불어 무궁하게 전하겠는가. 公의 손자 찬성(贊成) 한산군(漢山君)이 자손이 오래되면 선조의 뜻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막내 아들 부사 성언과 손자 현감 망을 시켜 그 친구 의성 김안국(金安國)에게 부탁하여 공의 사적을 대강 적어 돌에 새겨 뒷사람에게 끼치게하니 내가 이르되 공의 대절이 이 같으니 다른 것은 대개 추상할 수 있다. 가범(家範)을 지켜 관작이 혁혁하고 내외증현손(內外曾玄孫)이 사백여명이 되니 이 어찌 하늘이 공의 덕을 보답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해 명하여 가로되,

 

公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과 같고 공의 높은 절의는 태산 교악과 같도다. 주나라같이 융숭하고 한나라같이 창성함에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가는데 저 멀리 나는 기러기는 마침내 어찌 할 수 없구나. 성군의 도량이 아니였다. 공을 뉘가 이루리. 저 높은 바람 엄자뇌(嚴子瀨)와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길이 끼쳐주어 떨어뜨림이 없도다. 공경히 이글을 새기노라.

정덕 십삼년 (1518년) 겨울에 대광보국숭록대부 한산군 손(蓀) 입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지음

 

 

  석탄공 사적부설

 

석탄공은 고려조 말기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이색과 정몽주, 길재, 서견 및 태종과 형제의 의를 맺고 고려 공민왕을 섬기다가 우왕 때에 요동 땅을 치려하거늘 석탄(石灘)이 극히 간하기를 지금 국내 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니 소장지변이 생길까 염려이니 요동을 침이 불가하다고 극히 반대하되 왕이 듣지 않으니 때마침 조민수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석탄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 보냈었다. 이태조 혁명 초에 석탄은 이미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 남한산에 들어가서 모든 인사를 끊고 고죽부(孤竹賦)와 경송시(勍松詩)를 지으니 그 글 뜻이 극히 강개분울하여 보는 사람으로서는 슬픔을 참기 어렵더라. 석탄은 항시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하니 어찌하리요, 하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다가 문득 삼각산을 바라보며 탄식하되 간신 조민수여, 나의 한이로다. 주먹을 쥐고 이를 갈며 평상을 치니 손바닥이 다 터졌더라. 하루는 이색이 귀양이 풀려서 적소로부터 밤에 석탄의 집으로 오니 서견은 이미 와 있거늘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되 국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리가 동시에 사직하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어서 이런 변을 안 볼 것을 하고 吉再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음을 회탄하였다. 길재는 이미 산중으로 갔으니 과연 선각자로다. 즉시 이색은 오대산으로 가고 서견은 금천장으로 도망하다. 그 무렵에 태조가 석탄을 불러 벼슬을 주어 받지 않으면 치죄하리라, 하니 이천우(李天祐) 등이 태조에게 말하되 李某는 고려조 때 수절 대신이요, 고집이 대단하니 벼슬로도 달랠 수 없고 죽여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니 태조가 그 말을 듣고 끝내 석탄을 부르지 않다가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석탄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석탄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 버렸다. 태종은 석탄을 불러도 병을 핑계삼아 안 올 것을 알고 친히 남한산 아래로 와서 석탄을 만나보고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 하며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酬酌)하여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한나라 왕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은가? 하니 석탄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요, 하고 因하여 길재(吉再)가 황화(黃花)로 백이(伯夷)를 제사(祭祀)지낸 일을 말하니 태종이 석탄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니 대신들이 석탄을 탄핵하되 석탄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 죄 가장 크다 하니 태종이 가로되 무릎을 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 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석탄을 헐뜯지 못하더라.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위에 친필로 시를 써서 석탄에게 보내니 그 글 뜻은 술 석 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 천년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 시키지 못하리로다 했었다. 즉시 석탄의 큰 아들 우생에게 사온주부를 특배하였다. 석탄의 동생 이름은 양몽(養蒙)이요, 벼슬은 판도 판서였는데 명철한 분이다. 먼저 고려의 국운이 다 됨을 알고 남한산장으로 도피하여 농부가 되었다가 이조 혁명 후에 왕촉전(王蜀傳)을 지어 석탄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형은 정몽주와 같이 고려조를 섬기다가 몽주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은 아직 생명을 보존하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 가십니까, 하니 석탄공 종중이 이날부터 만 권 서책을 다 한강에 던지고 의관을 벗어 불사르고 영영 산에서 나오지 않고, 남녀 혼인을 다 전조 대신들과 하고 이조 대신들과는 절대 상대하지 않으니 지금 광주 사람들은 석탄 형제의 굳은 절의를 옛날 백이와 숙제에 비하고 경기도 광주에 구암서원을 짓고 둔촌선생과 석탄선생을 봉향하였다.

 

 

  태종(太宗)의 우정(友情)

 

李養中은 太宗芳遠과는 어릴 때부터 한 마을에서 자란 竹馬之友이며 高麗末의 遺臣이다. 그는 芳遠이 文科에 及第하여 新進勢力을 形成할 때까지도 서로 多情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나 芳遠이 李成桂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것을 보고는 크게 분개하여 落鄕하고 은둔생활을 하던 사람이다. 太祖의 創業을 튼튼히 하기 위해 數많은 高麗遺臣을 죽인 芳遠이었으나 李養中만은 차마 해칠 수가 없었을 程度로 友情이 두텁던 터이어서 王位에 오른 후 漢城判尹 等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李養中은 每番 받지 않았다. 在位 末年에 다시 傳敎를 내려 李養中을 불렀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 왔다는 都承旨의 말에 「대감이 집에 안 계시면 며칠을 기다렸다 가라도 꼭 答旨를 받아오도록 하라」는 太宗의 말에 다시 李養中이 사는 마을로 내려간 軍卒은 역시 출타중인 李養中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酒幕에서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그만 젊은 酒母와 情이 들고 말았다. 그런 것을 알 턱없는 太宗은 다시 都承旨를 불러「누가 傳敎를 가지고 갔기에 李養中大監에게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지금 당장 令을 내려 觀察使 휘하에 있는 軍士를 대동하고都承旨 그대가 直接 내려가서 대감을 모셔 오도록 하라」하고 호령하므로 都承旨가 가마를 준비하여 찾아 갔으나 李養中은 만나지 못하고 軍卒만 잡아서 漢陽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旅行에서 돌아온 李養中은 酒母에게 그 동안의 사연을 들었으며 그녀의 애절한 所望을 뿌리 칠 수 없어 잡혀간 軍卒을 求해 주기로 約束, 그토록 피하던 太宗을 만나러 갔다. 李養中의 입궐소식을 傳해 들은 太宗은 반가움에 못 이겨 버선발로 뛰어 나와 맞아 드렸다. 그러나 李養中은 自己에게 傳敎를 가져 왔다가 酒母와 情이 들었던 軍卒을 석방해 줄 것만 부탁했을 뿐 除授하는 벼슬은 끝내 받지를 않았다. 뿐만 아니라 며칠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다가는 아무 말 없이 종적을 감추어 버렸는데 깜짝 놀란 太宗이 사람을 시켜 百方으로 찾아보았으나 끝내 종적을 알 길이 없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太宗은 王位를 世子에게 물려주고 食飮을 전패하며 자리에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太宗이 묻힌 獻陵에 와서 정성껏 祭를 올리는 한 老人이 있었는데 그가 곧 石灘公 李養中이였다고 한다. 石灘公 諱 養中도 太宗이 붕어(崩御)한 2년후 1424년에 별세하시었다.

 

 

  석탄공 (휘 양중) 행장

 

 

 

  동명 유래(洞名由來)

 

高德洞(고덕동)

石灘 岩灘兄弟분의 높은 뜻을 기리는 뜻으로 새긴 이름이다. 元來는 廣州郡九川面의 一部로서 高麗末에 刑曹參議 石灘公 養中이 李太祖의 革命을 反對하여 이곳에 와서 숨어 사는데 太宗이 옛親舊의 情을 생각하여 漢城判尹을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고 太宗이 廣州에 거동하여 石灘公을 찾으매 石灘公이 平民의 服色으로 거문고를가지고 뵈옵고 병술을 기우려 서로 즐겼으나 동생인 岩灘公 養蒙께서는 太宗을 만나 주지 않으시고 元積山으로 피하였다. 뿐만 아니라 암탄은 子孫들에게 「너희들은 科擧에 參與해서는 안된다. 너희들이 科擧를 보게 되면 나의 志操를 짓밟는 行爲가 되는 것이니 이를 銘心하고 科擧에 應試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준절이 타일렀다. 太宗께서는 그 굳은 절개에 탄복 하면서 特命을 내리기를 李養蒙의 子孫에게는 萬世를 두고 賤한 일을 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그 후 世祖大王께서 여러 臣下를 모아놓고 書筵(서연)을 베풀고 節義問題를 내걸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때 世祖가 묻기를 李養蒙에게 子孫이 있느냐? 하시니 그 중에 한 臣下가 말하기를 李養蒙의 玄孫되는 明仁이 臣의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世祖께서는 이 말을 듣고 즉석에서 靖陵參奉의 職을 내리게 하였다. 이 消息이 明仁公에게 알려지니 祖上의 遺命을 어기고 내 어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祖上의 遺命을 지키기 위해서는 下命에 應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일가 권속을 거느리고 斗驛이란 곳으로 피해가서 살았다. 그리하여 이 두 兄弟분의 높은 德을 기리는 뜻으로 高德里라 하였는데 一九一四年 三月一日 京畿道 區城 劃定에 따라 가재울 비석말 방축말과 동자골의 一部를 倂合하여 高德里의 이름을 그대로 따랐으며 一九六三年 一月一日 서울特別市에 編入되어 高德洞이 되었다.

 

고덕산(고지봉)

高麗末 石灘公  李養中이 세상을 避하여  은거한 강동구 고덕동 산93-3번지 일대를 高德山, 高志峯이라하며 강동구에서 아래와 같은 표지판을 설치하여 관리하고있다.

 

王宿灘(왕숙탄)

太宗이 南漢山下에 은둔한 石灘公을 찾아 하룻밤을 宿泊하고 갔다하여 그 곳을 王宿灘이라 불렀고, 오늘의 왕숙천이 되었다.

 

석탄공 휘 양중 묘역

 

고덕재

 

석탄공 휘 양중 공덕비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호간공 (諱 蓀)묘역      휘 손 신도비(諱 蓀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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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각 -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諱 蓀 신도비

 

 

  한산군(漢山君) 胡簡公 (諱 蓀) 행장

 

 

 

  석탄공파 소목도

 

 

 

 

 

 

  암탄공 휘 양몽 묘비문(巖灘公諱養蒙墓碑文)

 

巖灘公派는 고려 23대 고종((1213~1259년) 때 廣陵三賢으로 칭송받던 廣陵三益 중 諱 익강(益康, 令同正, 戶長)을 중시조로 모시고 5대손 巖灘公 養蒙(고려 판도판서)의 호를 따라 대종회를 구성한 廣州李氏의 支派입니다. 석탄공과 암탄공은 형제지간으로 祖考는 高麗文科 軍簿佐郞을 지내신 諱 全斯 이시고 考는 高麗文科 가선대부 順天府使를 지내신 諱 方貴 이시며, 석탄공과 암탄공 두분은 모두 두문동 72현으로 고려말의 대표적인 수절신(守節臣)이다.

 

암탄공(巖灘公) 휘 양몽(諱 養蒙) 墓碑文

하늘의 원리는 크고 땅의 영기는 밝고 밝은데 公께서 이 두 기운을 타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시니 광주이씨의 후예이시다. 諱 養蒙이시며 호는 巖灘이시니 시조 신라 내사령 휘 자성(自成)의 후손이시며 석탄 휘 양중(養中)의 아우이시다. 천성이 강직하시고 인품이 단아하시며 효심이 지극하시고 충절이 또한 비할 데 없었다. 고려 공민왕조에서 문과급제하여 벼슬이 대광보국숭록대부행(大匡輔國崇祿大夫行) 판도사판서(判圖司判書)시고 호부를 수임하시어 재화를 잘 다스리시고 나라가 부하고 병력이 강하게 될 계책에 힘쓰셨다. 그러나 시운이 불리하여 나라의 운이 쇠퇴하니 공민왕이 노국 대장공주의 세상을 뜨게 된 것을 비통해 한 연유로 정사에 관심이 없어 세상이 어지러워 짐으로 국내의 근심과 국외의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다. 公은 국운을 통탄하고 항상 임금님을 좌석에 뫼시어 기울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험에서 구제하기에 노력하였으나 대세를 회복하기 어려워져서 끝내 효력이 없었는데 결국은 환관 최홍지(崔洪之)들에 의해 역적의 변을 당하게 되니 公께서 심히 비통하시어 피눈물을 흘리시고 애달파 하셨다. 후에 왕우(王禑)와 왕창(王昌)이 어둡고 나약하여 재기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이씨의 당세가 왕성하여 마침내 공양왕을 폐하고 세상이 바뀌어 이씨가 등극하니 公이 형과 더불어 광주 남한산성 아래 동부면 덕풍리로 퇴거하셨다. 태종께서 광주에 오셔서 임금이 되시기 전의 친구의 의리로 공의 형제를 불러 서로 옛 정으로 대하였으나 공께서는 절하고 대하기를 싫어하고 마침애 실촌면 원적산 아래 만선동으로 피신하여 숨어서 수양하고 나가지 않으시며 자손들에게 유언해 가르치기를 과거 보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하시고 신하 노릇하는 길도 막으시다. 동네 뒤에 높은 산이 있는데그 중에 주봉의 이름을 恭愍峰이라 하고 밤이나 낮이나 사모하여 군주의 위엄을 나타내고 아침 저녁으로 향배를 하여 신하의 지켜야 할 도리를 다 하시었다. 태종께서 이 일을 듣고 그 충절을 탄식하고 특히 하교하시기를 이양몽의 자손들에게는 영세토록 천역(賤役)을 시키지 말라. 오직 공의 충절만이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는구나 하셨다.

 

배(配)에는 정경부인 나주박씨이신데 사남이녀를 낳으셨으나 유훈을 받들어 벼슬길에 오르지 않기를 현손 휘 명인(諱 明仁)까지 이르렀다. 일찍이 조회하는 자리에서 절의에 대한 말이 나왔을 때 上께서 李아무의 후손들의 거처를 물으시니 이웃에 살던 재상 한 분이 그 소재를 대답하니 그 자리에서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제수하시며 벼슬자리에 나오라 하시어 그 후부터 자손들이 과거보기 시작하여 5대손 휘 몽설(夢說)께서 무과에 급제하시어 병자호란 때 임금님을 뫼시고 남한산성까지 호위했다. 벼슬이 훈련원 검정에 이르고 판서를 추증받았다. 그 외에 후예들은 청절을 굳게 지키고 영욕(榮辱)을 돌아보지 않으며 선영 아래를 떠나지 않고 광주 용인 등지에 이웃해서 살아온 지 오늘날 500 여년 세상이 바뀌고 천명에 변화가 수차 있었으나 근년에 이르러 公의 영적 음덕이 다시 내려 한 집안 여러 일가들 중 이름난 분들이 날로 늘어가서 영명하시 은덕에 감동되어 뜻을 모으고 정성을 다하여 비석을 세우고 석물을 갖추어 그 덕을 세상에 밝히며 명하니 贊曰,

 

천운(天運)이 수(數)가 있고 지기(地氣)가 서로 통해 수양산(首陽山) 고사리를 원적산(元積山)서 캐였도다. 백이숙제(伯夷叔齊) 맑은 절개 암탄공(巖灘公)의 어지신 뜻 광릉땅 동쪽 준령(峻嶺) 공민봉(恭愍峰)이 주봉(主峰)이라. 충심은 향일(向日)하고 절개는 의송(依松)하니 두 임금 불배(不拜)함은 만세에 엄훈(嚴訓)이라. 반천년 오래 세월 영명을 빛내노니 수만년 지나도록 무궁하게 전하소서

단기 4309년(1976년) 1월

 

 

  암탄공파 소목도

 

 

 

 

 

 

栗亭公派는 고려 23대 고종((1213~1259년) 때 廣陵三賢으로 칭송받던 廣陵三益 중 諱 익비(益庇, 尙書左僕射 상서좌복야)를 중시조로 모시고 7대손 栗亭公 관의(寬義, 1409~1491) 호를 따라 대종회를 구성한 廣州李氏 지파로 광주이씨의 宗家이며 시조 諱 自成(17대 내물왕 356~402년)과 諱 君隣(23대 법흥왕 514~540년) 諱 龍壽(29대 태종무열왕 654~661년), 휘 향림, 휘 한희(56대 경순왕,927~935), 휘 방인의 등 廣州李氏으 先代祖의 設壇管理 및 시제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율정공 휘 관의(寬義) 묘비명

 

공(公)의 휘(諱)는 관의(寬義)요 자(字)는 의지(義之)요, 고조(高祖)의 휘(諱)는 한(漢)이니 사정(司正)이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녹생(祿生)이니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이요 조(祖)는 밀(密)이니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요 고(考)는 지(知)이니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니 일찍 의주판관(義州判官)을 지낼 때 중국인(中國人)이 후(厚)히 뇌물을 바치며 밀수(密輸)장사를 하려고 하였으나 공(公)은 뇌물로 주는 비단실 十묶음을 홀로 물리쳐서 청렴(淸廉)함이 천조(天朝)에 까지 전(傳)해졌고 세종(世宗)께서는 포상(褒賞)으로 의복(衣服)을 하사(下賜)하시고 정려(旌閭)까지 내렸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공(公)이 기축년(己丑年, 1409)에 나셔서 송정금반지문(松亭金泮之門)에서 수업(受業)하여 학술(學術)이 정밀((精密)하고 덕행(德行)을 겸비(兼備)하여 일두 정여창(鄭汝昌)과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다. 세종조(世宗朝)때에 진사(進士)에 올랐고 후(後)에 이천(利川) 양악산(陽岳山)밑에 물러가 살며 스스로 호(號)를 율정(栗亭)이라 하고 성리학(性理學)을 연구(硏究)하며 이를 이어 발전(發展)시키는 것을 그 임무(任務)로 삼았으며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그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하여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임(辭任)하고 전리(田里)로 돌아왔다.

 

성종십사년(成宗十四年) 계묘(癸卯, 1483)에 왕께서 부르심에 편전(便殿)에 입대(入對)하니 왕께서 나라 다스리는 치도(治道)를 묻다가 성명(性命)의 근원(根源)에 미치고 또 천지도수(天地度數)와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세차력법(歲次曆法)에 대(對)해 물으시니 공(公)이 상세(詳細)하게 말씀드리매 왕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가상히 여겨 장차 발탁(拔擢)하여 쓰고자 하였으나 공(公)은 늙었다며 사양하고 고향(故鄕)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고 이 때 나이 七十五라 왕께서 그 뜻을 받아들이고 의복(衣服)을 하사(下賜)하였고 관(官)에 명(命)하여 미두(米豆)를 하사(下賜)하고 포상(褒賞)으로 장려(奬勵)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공(公)이 졸(卒)하신 후(後) 가정(嘉靖)四十四年 乙丑(一五六五)에 향현사(鄕賢祠)에 향사(享祀)되고 만력(萬曆)二十八年 (庚子, 1600)에 이천(利川) 설봉서원(雪峰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그 행장(行狀)을 지으며 이르기를 정주(程朱)의 학문(學問)을 닦고 공맹(孔孟)의 연원(淵源)을 탐구(探究)했다 하였다. 묘(墓)는 이천(利川) 관동(冠洞) 양악산하(陽岳山下) 분토곡(墳土谷)에 있다. 비는 정부인(貞夫人) 진주강씨(晉州姜氏)니 수사(水使) 순경(純敬)의 女로서 三兄第를 낳으니 장(長)은 점이니 부제학(副提學) 도승지(都承旨) 한성판윤(漢城判尹) 증시문호공(贈諡文胡公)이요 차차(次)는 퇴(堆)이니 용천부사(龍川府使)요 차(次)는 지(址)이니 갑산교수(甲山敎授)요 점의 자(子)는 종기(宗箕)이니 공주판관(公州判官)이요 다음은 종삼(宗參)이요 女는 강세구니 감찰(監察)이요 퇴(堆)의 자(子)는 종각(宗角)이니 현감(縣監)이요 다음은 종두(宗斗)요 종익(宗翼)은 생원(生員)이요 종진(宗軫)이며 지(址)의 자(子)는 종규(宗奎)이니 장사랑(將仕郞)이요 다음은 종벽(宗璧)이니 호조참의(戶曹參議)요 女는 김백균(金百鈞)인데 생원(生員)이며 이하(以下)는 다 기록(記錄)하지 못한다. 아! 가도(家道)가 어렵게 되어 공(公)의 높은 덕(德)과 훌륭한 공적(功績)이 일성(日星)과 같이 빛났건만 이제 와서 비석(碑石)을 세우고자 하니 세대(世代)는 비록 멀다 하나 어찌 한 구절(句節)의 명(銘)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인(因)하여 명(銘)하여 가로되 덕을 심는 것은 나무를 심는 것과 같고 학문(學問)을 쌓는 것은 곡식을 쌓는 것과 같이 하였네. 풍우(風雨)에도 꺾이지 않고 천년(千年)을 두고 향사(享祀)받으리로다.

 

  歲辛丑 月 日

十四代孫 泰均 삼가 씀

 

 

栗亭公 諱 寬義 贈吏曹判書公之墓(墳土谷)                                栗亭公 墓碑

 

 

  율정공파 소목도

 

 

 

 

 

 

遁村公派는 고려 23대 고종((1213~1259년, 崔瑀 집권시기) 때 廣陵三賢으로 칭송받던 廣陵三益인 諱 익비(益庇, 좌복야)의 3대손 諱 唐을 中始祖로 모시고, 그의 자 遁村公 諱 集의 호를 派宗會 명칭으로 삼는 廣州李氏의 支派 宗會이다.

 

 

  중시조(中始祖)  휘 당(諱唐)의 일화(一話)

 

둔촌공파(遁村公派)는 고려 23대 고종((1213~1259년) 때 廣陵三賢으로 칭송받던 諱 익비(益庇, 尙書左僕射)의 3代孫인 諱 당(唐, 국자생원)을 중시조로 모시고 아들인 둔촌공 휘 집(遁村公 諱 集)의 호를 따라 대종회를 구성한 廣州李氏의 支派입니다. 朝鮮朝에서 대단한 繁榮을 누렸던 大宗中으로 遁村公 손자인 忠僖公 諱 仁孫의 子 5兄弟가 다 卿相의 地位에 올라 八克朝廷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의 當代 第一의 文閥家門이 되었습니다. 遁村公과 十韻科公 휘 子齡과는 형제지간 이시다.

 

영천의 중시조 諱 唐 묘역    

신라가 고려에 손국(遜國)하는 과정에서 칠원성백에서 회안 호장으로 강계된 휘 한희의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지방에 살면서 이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다고 주위에 알려졌고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어 고려말경에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들 중에 광릉삼현으로 명성을 떨치던 광릉삼익이 있고 광릉삼익의 맏형인 휘 익비의 3대손 휘 당(唐)이라는 이가 있어 고을 원님의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원님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자손들이 번창하니 광주 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둔촌공파의 대부분 사람들이 이 분의 후손들이다

 

휘 당(李唐)이 원님의 딸과 혼사를 맺게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말에 광주고을의 한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 앉아있는 꿈을 꾸었는데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보니 자기의 아전인 당(唐)이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터라 며칠을 생각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신랑신부가 혼례를 올리고 살면서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어려서부터 주위에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이 아들 다섯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아전의 자식으로 오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이 온 나라에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다섯 아들 중 둘째가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호를 딴 서울의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 둔촌공파는 휘 당(唐)을 중시조로 하고 둔촌공을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중시조 휘 당의 묘소는 경북 영천에 있고 중시조비 인화 이씨의 묘소는 광주군 동부면 덕풍2리에 있는데 중시조의 묘소가 영천에 있는 것은 둔촌공 諱 집(集)과 영천최씨(永川崔氏) 최원도(崔元道) 사이의 깊은 우의를 상고시키는 일화와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중시조비 인화이씨의 묘역     

최원도는 고려말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영천 땅에 내려가 세상을 등지고 살고 있었고, 최원도(崔元道)와 서로 벼슬과 학문으로 우의가 돈독하던 휘 집(集) 또한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한 후에 늙으신 아버지에게 화가 미칠까봐  피신을 위해 경상도 영천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나섰다. 몇 달만에 도착한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 날 이라 잔치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친구집 문간방에 아버지를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 최원도가 소식을 듣고 문간방으로 뛰어나와서

" 망하려면 혼자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하는가. 친구에게 복을 전해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전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 하며 친구 부자를  동네 밖으로 내몰고 부자가 앉았다 떠난 문간방을 역적이 앉았던 곳이라 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데서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두  친구는 서로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집근처에 숨어있다가 한밤중에 서로 반갑게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휘 집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이후 4년 동안을 보내게 되었는데 오로지 최원도 혼자만 알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우선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고 반찬의 양을 늘려도 주인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시중드는 몸종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러 달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몸종이 하도 궁금하여 하루는 주인이 그 음식을 다 먹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문틈으로 엿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둘과 함께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종은 최원도의 부인에게 고하였고 부인은 남편에게 어찌된 연고인가를 묻게 되었다. 최원도는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비밀을 엄수 할 것을 다짐하였고, 만약에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두 집 가솔들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자기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느끼게된 몸종은 몇날을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을 하였다.

 

그 몸종의 이름은 "제비"라 하였고 최원도 부부는 아무도 모르게 뒷산에 묻어주었는데, 나중에 이 사연을 알게된 최원도와 이집의 후손들이 그 몸종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 묘비에 연아(燕娥)의 묘라고 세웠고 지금도 휘 당의 묘소 부근에 최원도의 몸종 "제비"의 묘소가 있으며 양쪽집안 조상의 묘제 때 연아의 묘에도 함께 제사를 지내준다고 한다.

 

몸종이 자결한 후 얼마 안되어 이집의 아버지가 최원도의 다락방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이때 최원도는 자기의 수의를 내주어 정성껏 염습을 하고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 어머니의 묘 부근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경상도 영천에 지금도 있는 광주이씨 둔촌공파 중시조 휘 당(唐)의 묘가 바로 그것이다. 다락방 생활 4년만에 중 신돈이 맞아죽고 세상이 변하게 되어 나라에서 이집과 최원도를 중용 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이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치었다.

 

생사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우정은 그 후손들 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

 

조선 왕조 선조 때 한음 이덕형 선생이 잠시 경상도 도체찰사를 겸직 한일이 있었고 이때 조상을 구해준 최씨 가문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위토를 마련해주고 양가의 후손들이 대대로 두 어른의 제사를 함께 모시도록 일렀는데 이 관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여기 최원도가 세상이 바뀌어 서울로 올라 가게된 친구 이집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었다는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세상을 탄식하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고향 떠나서 아버지께 드린 효성 지하에까지 미치네. 한양은 멀고 먼 곳, 구름 연기만 자욱한데 나현(이당과 최씨 어머니가 묻힌 고개이름)위에 올라보니 수풀만 우거졌네. 앞뒤로 두개의 봉분을 나란히 세웠으니 그대와 나의 마음 누군들 알겠는가. 원하건대 대대로 지금같이 지내면서 서로의 이해를 떠나 깊은 정 변함없기를."

 

 

  둔촌공 휘 집(遁村公諱集) 유사(遺事) (遁村遺事)

 

선생의 諱는 集이요, 자는 浩然인데 初諱는 元齡이요, 자는 成老이며 호는 墨巖子 또는 南川이라 부르셨다. 生員공 諱 唐의 제二자로 원의 태정 정묘 六월 二일에 나시어 벼슬은 봉순대부 판전교시사에 이르렀으며 명의 홍무 정묘년 六월 六일에 졸하셨는데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지 경연 춘추관사, 판의금부사, 세자 이사에 증직되셨다.선생은 학문이 고명하시고 문장이 초매하셔 이름은 사림들 사이에 저명하였고 덕은 일세에 으뜸이어서 목은, 포은, 도은, 행촌, 야당, 척약재, 원재, 어촌등 제현들이 애경하고 추중치 않은 이 없었다. 천성이 개결하고 정직하셔 불의를 미워함이 지나치셨는데 홍무 무신년 가을에 역적 신돈의 문객중 선생과 동향인 채판서란 자가 있어 돈의 위세를 믿고 불의를 자행하기에 선생이 꾸짖어 물리치고 아울러 돈의 흉측한 실상을 나무랬더니 채가 돈에게 고자질하여 화가 곧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미복(미천한 사람이 입는옷)으로 어버이를 모시고 어린이를 이끌며 영남의 영천으로 도피하여 동년인 최원도에게 의탁하셨다. 최공은 접대를 매우 후히 하여줬으나 삼년 동안을 문밖에 나오지를 못하셨는데 선행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니 최공이 빈염 일체를 자기 부모와 똑같이 마련하여 주었다.

 

둔촌공 휘 집 영정

 

둔촌공 휘 집 묘역

신해년 六월에야 서울(개성)의 현화리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도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야 서울에 들어와 보니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듯 하오. 몸은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됐는데 이름만 옛 것이면 되겠오) 하시고 호연한 기운은 의가 모여야만 생긴다는 뜻을 취하셔 지금의 이름과 자로 고치셨다. 또 숨음으로써 난을 피할 수 있었기에 잊지 않기 위하여 둔자로 호를 하셨다. 선생께서는 영남에서 돌아오신 뒤에 천녕강사에 우거하셨는데 침류정(목은의 장자명), 육우당(척약재의 정자명) 척약재와는 서로 가까워 조석으로 만나 애기 나누면서 만년을 보내셨다. 임종에 목은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환갑이 된 연래에는 백병이 침노하니, 삼복과 가을철을 누워서 보냈노라. 향산거사는 필시 아무 탈 없겠지, 나는 먼저 도솔궁으로 가려네.)

 

 

  충희공(忠僖公) 묘소(墓所)의 천장유래(遷葬由來)

 

英陵(영릉)의 자리는 처음에 廣州李氏 둔촌공파 三世祖(삼세조)인 李仁孫(이인손)의 묘소였다. 太宗 때에 文科에 及第하여 右議政에 이르고 그의 父親은 淸白吏(청백리)로 유명한 李之直(이지직)이요, 그의 祖父는 高麗 末에 節義(절의)와 文章(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遁村 李集이다. 李仁孫은 슬하에 五子를 두고 별세하니 名地官(명지관)을 초빙하여 이 자리 영릉황당 (英陵皇堂)에 禮葬(예장)을 하였다. 이 때에 地官(지관)이 墓자리를 가리켜 하는 말이 「앞으로 이 분 아드님들은 今時(금시) 發福(발복)하여 멀지 않아 高官大爵(고관대작)이 續出(속출)할 것이니 아예 이 곳에 齋室(재실)을 짓지말고 또 이 근처에 있는 개울에는 다리를 놓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 후 얼마 안가서 아들 오형제가 차례로 현달하여 長子 李克培(이극배)는 각도관찰사와 절도사를 거쳐 영의정을 지내 광릉부원군의 勳封(훈봉)을 받았으며 二子 克堪은 형조판서에 광성군에 봉하고 三子 克增은 대사성판중추부사로 광천군에 봉하고 四子 克墩은 의정부좌찬성으로 광원군에 봉하고 五子 克均은 좌의정으로 광남군에 봉했다. 이 분 五兄弟 외에 從兄弟(종형제) 3人도 현달하였으니 李克圭(이극규)는 병조참의요, 李克基(이극기)는 禮ㆍ공조참판이요, 李克堅(이극견)은 좌통례에 起用(기용)되었다.

 

「아들을 낳으려거든 마땅히 광주이씨 같은 아들을 낳을 것이요.」한 이 말은 성종대왕이 그 당시 인물들의 출처를 말한 유명한 말이다. 李克(이극)(즉, 이 분들을 세칭 八克朝庭(팔극조정)이라 함)은 다 호걸이요 諱忠(휘충)은 畵龍鳳(화룡봉)이라 하여 그 당시 광주이씨의 번창이 얼마나 극에 이르렀나를 알 수 있다.  이들이 살고 있었던(현재의 서울 신문로와 정동 일대) 五子 登科(등과) 五子封君(봉군) 집으로 「五君골」이라 불렀다.

 

世宗大王은 洪武(홍무) 30年 丁丑(1397)年 4月 10日에 출생하여 永樂(영락) 16年 戊戌(1418)年 8月에 受禪(수선)하고 景泰(경태) 元年 庚午(1450)年 2月에 昇遐하니 廣州 獻陵(헌릉) 서쪽에다가 葬事(장사) 하였다. 在任(재임) 32年에 壽(수)가 54歲였다. 世宗(세종)이 돌아간 지 얼마 후 世祖大王 꿈에 世宗大王을 뵙고 친근히 말씀을 받들어 즐거움이 生時(생시)와 같았다. 그 후 世祖는 추모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여 世宗大王과 昭憲王后(소헌왕후)를 위하여 獻陵(헌릉) 옆에다가 절을 세워 명복을 비는 장소로 하고자 하였다. 이에 有司(유사)들에게 명하여 멀리 나무를 찍어 떼를 만들어 띄워서 강 언덕에 쌓아 놓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큰 비가 내려 다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 이듬해에 世祖가 돌아가시고 연이어 나라 안에 크고 작은 사고가 많아 陵(릉) 옆에 절을 짓고 할 겨를이 없었다. 때마침 지관이 아뢰기를「헌릉은 坐局(좌국)의 풍수가 옛법에 맞지 아니하니 마땅히 陵을 다시 세워서 큰 福을 받으소서」하고 말했다. 睿宗(예종)이 신하들과 의논하니 모두들 아뢰기를「移葬(이장)하는 法이 예로부터 있습니다. 이제 풍수를 맡은 지관의 말이 있음은 필히 詳考(상고)할 것이 있을 것이니 지관의 말을 따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고들 하였다. 이에 睿宗이 宰相(재상)을 나누어 각지에 파견시켜 陵 자리를 선택하게 하니 한때는 광주 이천땅을 거쳐 여흥땅(현 여주)을 답산하게 되었다. 산천이 수려하고 강물이 맑은 이곳 북성산에 대신과 지관이 올라가서 사방팔면을 살펴보니 한곳 산기슭에 정기가 어리여 있어 그를 따라 산을 내려와 찾으니 한아람들이의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덮고 있어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가 어려워 길마저 잃고 헤매고 있는데 마침 개울 저편에 돌다리가 보이는 지라 요행히 길을 찾아 들어가는 데 난데없이 천둥번개가 요란하면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일행들은 폭우를 피하려고 사방을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마한 묘막과 비각이 보였다. 그래서 그리로 가서 폭우를 피하고 있으려니까 한참 후 비는 멈추고 날이 청명해졌다. 일행들은 이 곳이 李仁孫의 山所라는 것을 알고 이왕 온 김에 구경 삼아 찾아 올라간 대신과 지관들은 지세를 살펴보고 뛰어난 명당자리라 저절로 탄성을 금치 못하였다. 이 자리야말로 군왕의 자리이지 일개 정승으로 묻힐 자리로서는 너무나도 과분하며 왕기를 범한 자리라 아니할 수 없는 명당자리였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이 묻혀 있으니 어찌할 바 못됨으로 일행들은 다른 곳을 살펴본 연후에 서울로 돌아와 예종께 復命(복명)하기에 이르렀다. 왕이 말하기를「경들이 답사한 결과 명당이라 생각되는 곳이 과연 있었던고」하니「예 두루 살펴본 결과 몇 군데 능산 자리가 될 만한 자리는 있었으나 천하명당 자리로 꼽힐 만한 곳은 딱 한 자리 있습니다.  여흥의 북쪽에 한 큰 골짜기가 있는데 산의 형세가 떡벌어져서 主山(주산)과 무덤자리가 분명한 곳으로 풍수법에 이르기를 산이 멈추고 물이 구부러진 곳은 百子千孫(백자천손)이 나며 만세에 승업이 계승한다고 하였는데 즉 이 곳이 그런 자리로 사료되며 신들이 본 바로는 능을 모실 곳이 이보다 나은 곳은 없을 듯 합니다. 그러하온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예, 명당이라고 이른 자리에는 황공하옵게도 다른 사람이 묻혀 있는 것으로 아룁니다.」 「그래, 그렇다면 누구의 산소가 그토록 좋은가.」「예, 전날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李仁孫의 墓인 줄 아룁니다.」 「응, 그래.」일행들의 말을 들은 예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지긋이 감고는 한동안 무슨 생각에 골똘히 잠기는 것이었다. 얼마 후 예종은 눈을 다시 뜨고는「그동안 수고들 하였소.」하고는 일행에게 어배주(술)를 내렸다.

 

예종은 그 후로 여러 날을 고심한 끝에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고 당시 평안도 관제사로 있던 李仁孫의 長子 李克培를 조정으로 불러들여서 차마 그 자리를 비워달라는 말은 직접 못하고 애원 비슷하게 은근히 예종의 심중에 있는 뜻을 비쳤다. 이러하기를 몇차례 거듭하니 이극배는 하는 수 없이 아우들과 상의한 끝에 자리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명당 자리를 받은 왕의 기쁨은 말할 수 없거니와 조정에 전지를 내리어 길일을 택하고 山役(산역)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산소를 헤치고 遺骸(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秘記(비기)를 새겨넣은 글 한 귀가 나왔다.「이 자리에서 연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 묘를 옮겨 모셔라.」라는 구절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연은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십리 쯤 밖에 떨어졌다. 이로 인하여 그 곳 동리 이름이 延注里(연주리)(現 신지리)라 불리어졌다. 그 자리에 이장을 한 후에도 대명당은 못되나 아늑한 자리로서 자손이 번창하여 수 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자손들의 祭享(제향)을 받는다. 廣州李氏가 山所를 파내니 산역군들은 본격적으로 산역에 착수하였다. 때는 成宗 戊子(1468)년 겨울에 시작하여 이듬해 己丑(1469)年 3月 6日에 廣州 獻陵에서 이장을 하여 소헌왕후 심씨와 합장을 하였다. 이 능 자리로 인하여 이씨왕조가 백년을 더 했다는 지리학적 설화가 지금도 전하여 오고 있다. 언젠가는 이 지역도 성역으로서 면모를 갖출 날이 있을 것이다.

 

 

  둔촌공파 소목도

 

 

 

 

 

십운과공파(十韻科公派)는 고려 23대 고종((1213~1259년) 때 廣陵三賢으로 칭송받던 廣陵三益 중 諱 익비(益庇, 尙書左僕射)의 3代孫인 諱 당(唐 국자생원)을 중시조로 모시고 아들인 십운과공(十韻科公) 휘 자령(自齡)의 관직명을 따라 대종회를 구성한 廣州李氏의 支派입니다. 십운과공(十韻科公)과 遁村공 諱 集과는 兄弟之間 이시다.

 

 

  십운과공 휘 자령(十韻科公諱自齡) 행장(行狀)

 

생원공(生員公)의 넷째 아드님이시며 십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참의(參議 正三品)에 오르시다. 공의 장자 연동(蓮仝)公은 장악원정(掌樂院正) 증 참판(參判)이시고, 손(孫) 봉로(蓬老)공은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시며, 공의 증손 두신(斗信)公은 태종조(太宗朝)에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로 병자문신옥사(丙子文臣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되고 장흥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신원되고 시(諡) 충민(忠愍)이다. 동부면 덕풍리에 公의 묘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실전하여 광주군 실촌면 유사리에 설단을 모셨다. 이후 단촐한 종족으로 살면서 대소관작(大小官爵)이 많이 나왔으며, 특히 1919년 기미 3.1독립선언 삼십삼인 대표의 한분인 종훈선생(鍾勳先生)이 公의 21대손으로 크게 명예로운 문중이다. 근안(謹按) 을해(乙亥) 1995년 춘(春)에 대종회가 비용을 지원하고 도유사 효영(孝暎)과 기획유사 천희(天熙) 양씨(兩氏)가 초혼(招魂)하여 지원금으로 판서공(判書公) 묘상단에 봉영(封瑩)을 조성하고 묘비 및 각종 의물을 설치하였다. 묘비명은 대종회 문화유사인 창순 현종(昶淳 賢宗)이 찬(撰)하였다. 근안(謹按) 광주이씨기미보(廣州李氏己未譜) 및 정묘대동보(丁卯大同譜)의 행장기록은 우기와 같으나 1997년 10월 증호조좌랑공휘섬(贈戶曹佐郞公諱暹)의 비문(碑文 : 강희<康熙> 56년 1717년 영의정 이여공이 찬함)에 고려조 관직이 판서라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고려조 판서는 조선조 참판이나 참의에 해당하는 직급이다.

 

 

  십운과공 휘 자령 비문(碑文)

 

공의 휘(諱)는 자령(自齡)이며 광주인이다. 여말(麗末)의 석학 둔촌선생(碩學 遁村先生)의 실제(實弟)시니 황고(皇考) 휘 당(諱 唐)께서는 본주리(本州吏)로 근칙하고 유현행(有賢行)하여 국자생원에 오르신 분이다. 황비 인화이씨(仁華李氏)는 본주태수의 따님이시다. 광주이씨의 선대는 신라 충신의 후예로 신흥 고려국에 손국(遜國)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왕건태조(王建太祖)의 명에 따라 칠원성백(漆原城伯)의 신분에서 본주향리(本州鄕吏)로 몰락 아전(衙前)을 세습하게 되었다.이때부터 사백여년간 그 후손들은 실지를 회복하고 더 이상 천한신분만은 상속하지 않겠다는 강한 집념이 유풍으로 전수하는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공의 대에 이르러 급기야는 오형제 구등문과(俱登文科)라는 신화를 창출하고 현달(顯達)의 문을 열었음으로 각계 공(共)히 각위 일대조로 표기한다. 인령(仁齡), 집(集), 희령(希齡), 자령(自齡) , 천령(天齡) 오형제중 넷째로 여대 충목왕조(忠穆王朝)에 십운과에 급제한 공의 용모는 둘째 백씨(佰氏) 둔촌선생(遁村先生)을 닮아 장중하고 강의(剛毅)하였으며 기품은 준수하였다고 한다. 관(官)은 통정대부이조참의(通政大夫吏曹參議)에 올랐으나 려망(麗亡)의 한을 품고 잠적 은둔함으로써 졸년대 및 매골처(埋骨處)를 알지 못함이 본손들의 한결같은 유한(遺恨)이 되어 왔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후손들의 생활이 곤궁하여 독립된 설단영역(設壇塋域)을 갖추지 못하고 증손 판서공 묘역에 위치한고로 기해(己亥) 1995년 춘(春)에 대종회 지원으로 판서공 상단 길지에 초혼(招魂)으로 봉영(封瑩)을 조성하고 묘비 및 각종 의물을 구비하니 육백여년간의 숙원을 성취하게 되었다. 배(配)는 숙부인 선산김씨(淑夫人 善山金氏)로 현령을 지낸 분의 따님이시다. 묘(墓)는 광주 고읍 역촌 후건좌였으나 역 실기처(亦 失其處)하였다. 이후 많은 후손들이 출사하여 공의 위적수훈을 계승하니 자 연동(蓮仝)은 통훈대부장악원정(通訓大夫掌樂院正)이고 증 호조참판이며 손 봉로(孫 蓬老)는 행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 자헌대부이조판서(贈 資憲大夫吏曹判書)다. 증손 두신(斗信)은 한림옥당(翰林玉堂)을 거쳐 자헌대부공조판서(資憲大夫工曹判書)에 올랐으나 병자문신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되고 장흥에 유배 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신원되니 시 충민이다. 현손 비(玄孫 庇)는 서사찰방전의현감이며 내손 숙경(來孫 叔耕)은 문과부사이고 숙강(叔剛)은 문과찰방이며 숙정(叔貞)은 서사생원이고 숙명(叔明)은 순처부사다. 곤손 침(昆孫 琛)은 장흥군지 기록에 의하면 성종조(性宗朝) 세자사부 문장학문 명어일세(世子師傅 文章學問 鳴於一世)라 하였으며, 발동은 서사군수(筮仕郡守)니 장흥입향조(長興入鄕祖)이고 척은 통정대부행호군수운판관이다.손 지분(蕓孫 之墳)은 문과군수(文科郡守)요. 십일대손 호선(好善)은 장사랑(將士郞)인데 장악원정(掌樂院正)이 증직 되었다. 십이대손 섬(暹)은 효가 절륜(絶倫)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이 증직 되었으며, 개화운동에 가담 민족혼을 고취하였고 기미년 독립선언 시에는 삼십삼인민족대표로 서명함으로써 청사에 갈이 빛나는바 되었다. 이십이대손 관영(寬永)은 종훈(鍾勳)의 자로 의병을 모집하여 침략자 왜군과 전투 중 용문산에서 산화(散華)하니 이 모두가 공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십운과공 소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