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廣州)는 서울 남부와 경기도 중부를 통칭하는 지명으로  본래 옛 지명은 회안(淮安)이었다.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으로 내려온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정주한 곳이 이 고장으로,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및 동국여지승람 등을 보면 모두 광주의 별호를 회안이라 하고 지금의 광주 경안을 옛날 회안국왕의 소도지라고 하였다.

 

백제 온조왕 13년에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불리웠으며, 370년(근초고왕 25년)까지 이곳을 한성(漢城)이라 하여 376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다.  553년(성왕 31년) 신라에게 땅을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756년(신라 경덕왕 15년)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40년(태조 23년)에 지명을 회안에서 광주로 고치고, 983년(성종 2년) 광주목이 되었다. 이에 고려 건국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키다가 칠원에서 회안으로 강계(降階)된 광주이씨 선조들은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淮安)으로 칭관하다가 다시 지명이 광주(廣州)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廣州)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광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17대 내물왕(奈勿王 356~401년) 때 內史令을 지낸 휘 자성(諱 自成)으로, 東國 萬性譜와 口傳된 광주이씨 上代系譜에 의하면 諱 自成은 아라가야(阿羅伽倻, 42~559 지역의 칠원성(漆原城 : 경남 함안 칠원면)에 世居해온 호족의 후예(後裔)로 그의 조상들은 가야에서 칠원성백(漆原城伯)을 세습하며 일종의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았었다.

 

그러나 內史令인 始祖 諱 自成과 後孫들은 伽倻가 아닌 新羅조정에서 대대로 出仕하였으며, 그 중 시조 諱 自成 (17대 내물왕, 356~401년)과 諱 군린(君隣, 22대 지증왕, 500~513년), 諱 용수(龍壽, 29대 태종무열왕, 654~660년) 등은 신라의 國內外 전투와 于山國 정벌, 統一 전쟁 등에서 각각 赫赫한 戰功을 세워 角干에 버금가는 지위에 올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內史令을 지낸 시조 諱 自成은 17대 내물왕(奈勿王 356~401년) 후대에 실성(實聖)과 눌지(訥祗)의 왕권 다툼에 訥祗를 도와 출전했으나 實聖에 패하여 戰死하였으며(401년), 18대 실성왕(實聖王, 402~416년)을 訥祗가 다시 죽이고 19대왕(訥祗王, 417~457년)으로 즉위한 후 이미 戰死한 諱 自城(?~401년)의 충절을 애석히 여겨 大角干을 추증(追贈)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23대 법흥왕19년(532년)에 신라가 금관가야가 멸망시키고 아라가야의 영토일부를 복속한 후, 복속된 칠원성(漆原城)의 성백(城伯)을 諱 自成의 직계후손인 諱 君隣에게 除授하고 칠원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그 후손들이 400여년간 漆原을 貫鄕으로 삼고 대대로 칠원성백을 세습하며 漢希 代에 이른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이 성세(盛世)를 누리던 始祖의 後孫들은 신라가 고려에 손국(遜國)하는 56대 경순왕(927~935)때 신라의 모든 성이 王建에게 항복(935년)한 뒤에도 마의태자(麻衣太子)를 王으로 섬길 뿐 王建에게는 굽힐 수 없다하여 끝까지 항거하는 절의를 지켰다.

 

이에 크게 노한 高麗 太祖(王建)가 대군을 이끌고 친히 칠원성을 함락시킨 뒤 李氏 性을 가진 일족을 모두를 회안(淮安: 현재廣州) 지방 관아의 奴婢로 삼도록 하고, 칠원성백이던 諱 한희(漢希)를 강계(降階)하여 회안호장 (淮安戶長)으로 삼아 이들를 이주시켰다.

 

이후 廣州官衙에서 수백년 衙前과 驛吏로 지나는 동안 시조 휘 자성(諱 自成) 가문의 상대소목(上代昭穆) 마저 소실되어 광주이씨의 上代系譜가 失傳되었으며, 단지 諱  自成(17대 내물왕, 356~401년), 諱 君隣(22대 지증왕, 500~513년), 諱 龍壽(29대 태종무열왕, 654~660년), 諱 향임(鄕任), 諱 漢希(56대 경순왕, 927~935), 諱 방인(防隣)등의 일부 계보상의 實名과 연대가 구전되어 왔었다.

 

이렇게 廣州에서 아픈 역사속에 수백년을 살아오면서도 廣州地方의 衙前 驛吏들 중에서 李氏 性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있고 덕망이 높다고 주위에 알려졌고,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어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우리 선조 광주 이씨들은 고려 말에 현달(顯達)했던 현조(顯祖)들을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계파별로 수보(修譜)를 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 고려 고종(1213~1259년) 때 광릉삼현(廣陵三賢, 廣陵은 현재 高德洞일대)으로 명성을 날리던 광릉삼익(廣陵三益)의 諱 益庇, 益俊, 益康 삼형제와 그 후손들의 현달이 가장 두드러졌으며, 諱 益庇 4대손인 이집(李集, 遁村公)과 諱 益康의 5대손인 이양중(李養中, 石灘公, 刑曹參議)과 이양몽(李養蒙, 巖灘公, 版圖 判書) 등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있고 덕망이 높은 자손들이 번창하였으며, 광주이씨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분들의 후손으로 탄생되었다. 특히 석탄공파와 암탄공파의 양중과 양몽 형제는 麗末 高麗 조정의 형조참의와 판도판서의 고위직에 올라 광주이씨의 중흥을 꾀하다가 李太祖의 朝鮮 建國으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3명의 두문동72현을 배출한 대표적인 충절가문이 되었으며, 諱 集의 둔촌공파 (遁村公派)는 조선 중기의 광주이씨 중흥의 주류를 이루면서 조선조 최고의 명문가로서 당대의 명성을 날렸다. 광주이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문과 급제자 196명, 무과 급제자 245명,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한 당대 제일의 명문이 되었다.

 

그러함에도 광주이씨는 始祖 以後 16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시조 諱 自成의 후손으로 단일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諱 自成을 始祖로 바로 세우지 못하여 각 지파별로 중시조를 세우고 지파별 대종회를 운영하고 있는 아픔을 겪고 있다.

 

    

        시조 내사령 휘 자성지단(始祖內史令諱自成之壇)                                      시조 설단비(始祖設壇碑)